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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팸 (@Im_DuckPam) → 듀부멘탈 (@tofumental59) 외전

 한 겨울 밤의 꿈은 마치 기적처럼

 송우기 전소연

 ※남자와 관련된 트리거 요소(ex. 폭력적 행위, 욕설 묘사, 그 외의 불쾌한 행동묘사)가 있습니다.

 A.

 “야, 암만 그래도 그렇지. 그걸 십만 원을 주고 사?”

 “그래, 내 말이. 사기 아님? 우기야, 그거 새 제품으로 사도 이만 원 넘을까 말까일 걸.”

 “아니, 너는 그걸 십만 원 주고 사오면서 아무 의심도 안 해봤어?”

 “심지어 며칠 전에 샀다며, 가기 전에 우리한테 말해보지. 존나 말렸을 텐데.”

 “도시락 싸가지고 다니면서 말림, 진짜로. 그리고 너희 학교까지 온 거 고마워서 커피 값하라고 만 원 더 얹어줬다며. 진심 흑우냐? 하긴 송우기 댄동 하는 거 보면 목 하난 기가 막히게 돌리긴 하지.”

 “진짜 좀 물어보고 갔으면 어디가 덧남? 우리한테 말했으면 진짜 적어도 모임 장소에 같이 나가주긴 했겠지.”

 “엥? 나가줄 거임?”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친구들을 살피던 우기가 의문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우기는 스스로 똑똑한 편이라고 자부하며 살았다. 그래서 지금 우기는 새로운 충격에 빠졌다. 내가 사기를 당했다고?

 

 의외로 순진한 면이 있는 대학생 우기는 그 정도 가격이 타산에 맞는다고 생각했다. 그야 이걸 산 이유는 추억 따위의 이유였으니, 우기는 다른 것도 아니고 추억의 가격이라면 이 정도쯤 하지 않을까 막연하게만 생각했었다.

엠피쓰리를 쓰던 그때의 우기는 듣기 싫은 수업을 안 듣기 위해 줄 이어폰을 꽂고 교복 소매 쪽으로 이어폰을 숨긴 채 노래를 듣곤 했다. 가끔은 옆자리에 앉은 짝꿍과 플레이리스트를 공유하기도 했고, 좋아하던 사람과도 그 엠피쓰리로 노래를 들었었다.

 그런 추억이 있는 엠피쓰리였으니까, 옛날에 살 때는 그 정도 가격이었으니까. 갖은 이유들이 머릿속에서 내어지고 있는 동안 그런 이야기를 꺼내던 친구들이 입을 다물었다. 야, 송우기 울겠다. 눈빛 사이로 오고 가는 대화를 눈치 채지 못한 우기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나 먼저 가볼게.”

 우기의 비장한 그 말에 친구들은 그러라고 했다. 그 정도로 속상해할 일인가. 그런 의문이 모임 사이에서 퍼지는 사이 우기는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터덜터덜 걷는 걸음엔 힘이라곤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에휴, 긴 한숨이 터져 나오는 걸 막을 수 없었던 우기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거기에 답 같아 보이는 곳이 있었다.

 소연 법률 사무소, 순간 우기는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법률 사무소면 일단 개인 변호사가 있단 뜻일 테니까, 법적 자문이라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경첩이 찌그러졌다가 펴지는 소리를 냈다. 우기는 어느새 문 안쪽으로 몸이 반쯤 들어간 상태였다. 우기가 들어섰는데도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우기의 동태만을 살피는 여자 하나에 우기가 잠시 주춤했다. 그러나 곧 입을 열었다.

이게 사기가 맞으면 너무 억울하잖아, 세상은 꼭 착하고 순진한 사람만 벗겨먹는 못된 습성이 있는 탓에 우기는 가끔씩 이런 일에 연루 아닌 연루가 되곤 했다.

 우기는 때때로 본인이 그런 일에 휘말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나는 추억이 사고 싶었을 뿐이라고, 이미 촉촉해지려는 눈가에 힘을 주며 우기가 말을 꺼냈다.

 

 “어떤 일로 오셨어요?”

 “이게 사기죄로 경찰에, 넘길 수, 있는지가 궁금해서…”

 우물우물 꺼내지는 우기의 말을 듣는 듯 꺼내던 서류를 집어넣던 여자가 의자를 돌리며 아주 잠시 우기를 쳐다봤다.

 “네, 의뢰인 분 성함이?”

 “송우기요.”

 “그래요, 우기 씨.”

 의자에 앉아있던 여자는 아무렇게나 손을 뻗어 책상 위에 있던 노트를 펼쳤다. 우기는 저 노트도 비싸 보이네, 뭐 그런 생각이나 하면서 코를 한 번 킁 빨아 들였다. 빨간 벨벳 재질의 노트 표지를 뒤로 하고 펼쳐지는 속지에 여자는 글씨를 적고 있었다.

 작은 손에 비해 큼지막한 손짓이 대충 어떤 필체일지를 가늠하게끔 했다. 우기는 어쩐지 그런 여자의 눈치가 보여 고개를 숙이고 여자를 빤히 바라보던 중이었다.

 소연 법률 사무소라는 걸 보면 아마 저분 성함이 소연이겠지, 저분이 과연 무슨 이야기를 해줄까, 그런 걸 궁금해 하면서.

 “어떤 일로 오셨죠?”

 느릿한 목소리가 묘하게 어른스러웠다. 우기는 그 목소리를 곱씹으며 울 것 같은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랬다. 그리고 해야 할 말을 조심스럽게 꺼내기 시작했다.

 “그게 말이죠. 제가 중고 거래로 엠피쓰리를 샀는데요.”

 “엠피쓰리요?”

 맞은편의 여자가 정말 의아하다는 것처럼 되묻는다. 그럴 수 있긴 하지, 요즘 누가 엠피쓰리를 써. 하지만 레트로 감성이나 짙은 추억 팔이에 미치면 그렇게 될 수도 있는 거였다. 가령 예전에 좋아했던 만화나 물건 따위를 펀딩하는 성인들의 모습 같은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보면 됐다.

 “네, 엠피쓰리요. 미키마우스 얼굴모양.”

 순간 일그러지는 맞은편 여자의 얼굴을 보면서 우기는 이게 그렇게나 큰 잘못인가, 싶어졌다. 물론 금방 표정관리를 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표정을 되감는 여자는 일그러진 표정을 오래 짓고 있진 않았지만 이미 우기가 목격한 건 한 거였다. 우기는 서서히 서글퍼지기 시작했다. 사기 당한 거 맞나봐.

 “그래서요?”

 “거래자분은 엄청 친절했어요. 별 말 없이 물건도 잘 받았는데, 친구들이 구매한 가격 듣고는 다들 놀라는 거 있죠? 저는, 이게 맞는 가격이라 생각해서 샀는데, 다들 사기 당했다고 그러는 거예요. 그게, 그래서…”

 기어코 우기의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황당해하는 여자의 표정은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실제로도 눈물에 가려 딱히 보이진 않았다. - 우는 우기에 여자는 울지 말라는 말을 하며 티슈를 건넸다. 눈물에 젖어 찝찝하게 찢어지는 티슈 조각 몇 개가 우기의 속눈썹 부근으로 말려 들어갔다. 그 젖은 티슈로 코까지 팽 푼 우기가 맞은편에서 들려오는 여자의 음성에 대답했다.

 “일단 진정하고 몇 가지 질문에 대답해주실 수 있으세요?”

 “네에…”

 “제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그런 옛날 물건을 중고로 거래하면, 그게 작동이 잘 되는지도 의문이지만, 거래를 한다면 만 오천 원 정도? 혹은 그 이하로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적정가격이 얼마죠?”

 “친구들이 거의 새 걸로 사면 이만 원이라고 했던 거 보면 변호사 님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우기가 훌쩍이며 여자를 쳐다본다. 여자는 잠시 침 삼키는 소리를 내더니 눈을 한 번 지그시 감았다 뜨며 질문했다.

 

 “얼마 주고 사셨죠?”

 “십만 원이요.”

 “십만 원이요?”

 여자는 이 말이 정말 당혹스러운 말인 것처럼 크게 소리를 냈다. 되묻는 음성인 것치곤 너무나도 놀란 행동거지에 본인도 당황했는지 짧게 죄송하단 말을 덧붙인 여자를 보며 우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전히 여자의 눈치를 보면서 우물쩍대는 어투로 말이다.

 

 “만원은 커피 값이요. 그 분이 굳이 저 다니는 학교까지 직거래하러 와주셔서 감사해가지고.”

 어느덧 여자는 우기의 모임 속 친구들과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기가 보지 못하도록 고개를 돌려 한숨을 쉬었으나 안타깝게도 큰 도움이 된 행위는 아니었다고 자부하겠다. 왜냐하면 그것 역시도 이미 우기가 봐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다 곧 여자는 정말 순수하게 궁금증이 드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 말을 꺼냈다. 그 잠깐 사이에 골라진 것 같은 질문이 우기의 귀 주변을 맴돌았다.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데. 왜 그렇게 비싼 돈 주고 사셨어요? 그, 옛날 물건을.”

 “저는, 그 가격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옛날에 사서 듣던 시절에는 십오만 원까지도 있지 않았나요? 저는 팔만 원 정도 주고 산 기억이 있지만. 그래서 중고여도 그 정도 가격인 줄 알았는데.”

 여자는 한참을 생각해보는 것처럼 미간을 찌푸리고 우기를 바라보았다. 이젠 표정관리라는 걸 할 생각도 없어보였다. 어이가 없어 보이는 여자의 그 표정에다 대고 우기가 할 수 있는 말은 딱히 없었다. 기껏 해봤자 본능적으로 나오려고 하는 죄송합니다, 정도였을 것이다.

 한참을 말이 나오지 않는 듯 입술을 꾹 깨물고 있는 여자의 얼굴을 우기가 힐끗대며 살폈다. 사기를 당했고 법적 자문을 구하러 온 거라 얼굴을 자세히 볼 생각은 못했는데 오늘따라 이런 바보 같은 모습을 보여준 상대 치고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그러니까, 우기의 스타일이었다는 것이다.

 우기는 그게 더 슬펐다. 나 지금 저런 사람 앞에서 이렇게 질질 우는 모습이나 보여줬다는 거지? 다시금 우기는 눈물이 날 것 같아 고개를 수그렸다. 여기서 뭘 더 해, 그런 생각이 드는 지금 우기는 여자가 말을 얼른 해주길 바랄 뿐이었다. 우기가 그 생각을 끝마칠 쯤 여자의 입이 열렸다.

 “일단 우기 씨한테는 미안한 말인데, 경찰에 가도 고소 못해요.”

 우기는 고개를 들었다. 너무 단호한 말씨에 오금 저리고 얼어붙어, 아니, 이게 아니라 우기는 더 이상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아, 같은 짧은 감탄사를 내려던 사이에 여자의 입이 먼저 열렸다.

 “판매자가 돈을 벌려는 마음을 가진 것 자체는 맞는 것 같아요. 그런데 실제 물건을 이미 받았고, 거래 사이에 더한 금품 요구도 없었던 데다가 이게 엄청난 거액도 아니고. 무엇보다 서로 거래할 때, 그 가격에 사는 게 맞다고 합의를 한 상태로 거래가 완료된 거면 제품에 고의적인 하자가 있지 않는 이상 고소할 수 없어요. 우기 씨도 그 가격이 적당하다 생각해서 샀고. 안 봐도 비디오인데. 우기 씨 거래 당시 문자나 카톡에도 그런 말들 해놨죠? 가격 좋다는 말.”

 우기가 어떻게 알았냐며 벌어진 입을 양손으로 틀어막았다. 여자는 골 때린다는 듯 눈을 잠시 찡긋거리다가 이내 곧 인자하게 표정을 풀며 말을 갈무리했다.

 “그래서 죄송한지만 고소는 어렵습니다.”

 “어떻게든 안 되나요?”

 “어떻게도 안 돼요.”

 꽤 강경한 말투. 우기는 풀이 죽었다. 안 되나보다, 변호사가 아니라고 하면 대부분 아닐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곧 우기는 제 입장에선 그나마 나은 선택지인 답안이 떠올랐다.

 “그 사람한테 가서 돈 받아올까요?”

 돈을 받아오면 그래도 덜 사기 당한 느낌이 들지 않을까, 늘 순진한 사람들은 저런 선택을 하기 마련이었다. 세상은 그렇게 착하지 않은데, 우기는 어쩐지 늘 그런 긍정적인 마음이 들곤 해서 간혹 가다 저런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굳이 따지자면 지하철을 지나갈 때 구걸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있는 잔돈 다 털어주는 타입이라고 보면 쉬웠다.

 “네?”

 그리고 그런 우기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여자의 입에선 근본적인 의문이 담긴 대답 같은 게 튀어나왔다. 네? 놀라는 소리가 아까 십만 원을 되묻던 소리처럼 꽤 컸다는 점에서 우기의 어깨가 잠시 움츠러들었다.

 “제가 가격 몰랐다고 하면 조금은 돌려주지 않을까요.”

 여자의 입에서 허, 하는 소리가 나왔다. 아마 본인도 모르게 뱉은 소리였을 거라는 생각에 우기는 바지춤에 손바닥을 밀어 닦았다. 땀이 왜 이렇게 나냐.

 “아니요, 절대. 돌려주지 않을 거예요. 일단 불러도 나올 리 없고. 말했지만 이 문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생각하세요, 교훈 삼아 넘어가는 걸로.”

 “그렇지만, 저는, 그러니까.”

 법적 자문을 구하려는 말은 아니었다. 푸념에 가까운 말들, 여자는 해보라는 듯 눈썹이나 까딱이고 있었다. 그냥 세상만사 인간사 드라마 듣는 표정으로 그렇게 무상하게 앉은 여자를 보면서 우기는 하려던 말을 이어나갔다.

 “추억의 엠피쓰리가 갖고 싶어서. 그거 진짜 추억이었거든요. 변호사님도 써본 적 있으세요? 저도 스마트폰이나 에어팟 같은 거 쓰는 이십대지만, 그렇지만 가끔 추억 팔이라는 거 하고 싶잖아요. 그 시절에 저는 엠피쓰리로 친구들이랑 우정도 쌓고, 짝사랑 상대랑 노래도 들어보고 그랬거든요. 그래요, 그런 거. 그러니까 저한테는 십만 원 덥석 줄만큼의 황금 같은 추억이었는데.”

 결국 우기는 다시 눈물을 터트렸다. 조금 억울해진 탓이었다. 어떻게 사람 추억을 가지고 그렇게 장난을 쳐, 그런 마음. 팔면서 자기도 그런 추억이 있다고, 가져가서 다시 좋은 추억 만드시라는 그런 말을 해줬으면서.

 여자는 울고 있는 우기에게 티슈와 물 한잔을 건네줬다. 우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공감과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그 사람도 참 나빴네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커피 값까지 받아가고. 그렇죠? 우기 씨도 참. 울지 마세요. 교훈 얻었다고 생각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그런 오래된 추억의 물건을, 우기 씨 아주, 금값을 주고 사셨네.”

 “저에게는 황금 같은 추억이니까요!”

 엉엉, 결국 우기는 모 예능에 나와서 왜 그러시냐며 펑펑 울던 남자 배우처럼 울어버리고야 말았다. 여자는 그런 우기를 보면서 손수건을 꺼내 우기의 턱까지 흐른 눈물을 닦아주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손길만큼은 참 다정하단 생각을 하며 우기는 건네받은 여자의 손수건으로 제 눈 밑을 비벼 닦았다.

 “죄송해요. 갑자기 떠들어대서. 어린애처럼 울기나 하고”

 암만 맞은편의 여자가 나이가 더 많을 것이라고 한들 이미 우기도 성인이었다. 뒤늦게 미안하고 창피해졌다. 우기가 다시 한 번 더 코를 먹으며 꺼낸 말에 여자는 우기를 향해 분명 좀 전에도 했던 것 같은 비슷한 양상의 대답들을 꺼냈다.

 “괜찮아요. 당연히 그럴 수 있죠. 제가 도움 드릴 수 있는 게 없는데, 마음이 얼마나 서운하시겠어요.”

 여자는 더 이상 해결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판단 내렸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우기 쪽으로 다가왔다. 여자가 우기의 쪽으로 손을 내밀었고 우기는 그 손 위로 제 손을 겹쳤다. 퍽 곤란해 보이는 표정을 짓는 건 덤인 것처럼 우기의 표정은 조금 울상이 되어 있었다. 단순히 우는 것과는 다른 표정으로 우기는 제가 하려던 말을 꺼냈다.

 “시간 뺏어서 죄송해요. 의뢰비인 셈 치고, 손수건이라도 빨아서 돌려드릴게요. 너무 너무 … 더러워져서…….”

 여자의 표정이 조금 당황스러워보였지만 우기는 그런 말이라도 해야만 했다. 양심의 가책이라면 가책이라서 그런 거였고, 저 얼굴을 또 볼 핑계라면 핑계라서 그런 거였다. 그런 우기를 가만 보고 있던 여자가 가뿐히 입을 열었다.

 “괜찮으니까 여기 사무실에서 점심이라도 먹고 갈래요? 제가 사줄게요. 그 사람한테 뜯긴 커피 값 받는다 생각하고.”

 

 * * *

 

 “깐풍 새우 맛있게 생겼다.”

 우기는 분명 혼잣말이었다. 코를 한 번 훌쩍이며 곰곰이 보던 우기의 말에 여자는 아무 말도 없이 중식 볶음밥과 깐풍 새우를 시켜주었다. 전화로 주문을 했다면 그러지 않으셔도 된다고 말렸을 텐데 일찍이 배달 어플로 시키는 바람에 말리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며 우기는 제 앞의 깐풍 새우를 젓가락으로 집어 들었다.

 여자는 우기를 넌지시 살피다가 숟가락 위로 수북이 쌓인 우기의 볶음밥 위로 단무지를 얹어주었다.

 “단무지 좋아하세요?”

 “원래는 채소 별로 안 좋아하는데 단무지는 좋아하는 편이네요.”

 “저도 단무지 좋아해요.”

 그러면서 우기는 웃어보였다. 부드럽게 밀리는 미소를 보던 여자는 우기가 깐풍 새우를 집느라 고개를 내리는 사이 볼을 긁적였다. 따라붙는 시선이 존재하는데도 우기는 그저 열심히 밥만 먹었다.

 “맛있어요.”

 그런 말을 꺼내면서 볼을 우물거리다가 우기는 고맙다는 말로 예의바르게 인사했다. 우기 스스로 낼 수 있는 가장 참한 말투였다고 생각하면서 마지막 한 숟갈을 꿀꺽 삼킨 우기가 여자를 바라봤다. 여자는 그런 우기를 보면서 픽 웃다가 말을 이었다.

 “우기 씨, 기분 좀 괜찮아졌어요?”

 “네에.”

 “그런데 우기 씨, 저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네, 뭔데요?”

 “그 엠피쓰리 갖고 싶어진 결정적인 이유가 뭐예요.”

 “추억의 엠피쓰리로 추억의 노래를 듣고 싶어져서요. 갑자기 그런 기분이 돼서.”

 우기는 그제야 좀 웃었다. 여자는 웃는 우기 얼굴 멀끔히 바라보다가 티슈를 내밀었다. 우기는 조금 거실한 티슈로 입가를 쓸어내리듯이 닦았지만 거기 말고 다른 곳에 튀었다는 여자의 말에 곧 얼굴 곳곳을 닦아 내렸다.

 

 “변호사님도 그런 적 있으세요? 옛날로 돌아가고 싶은 기분이요. 저야 뭐, 아직 대학생이라 그런지 고작 몇 년 전인 중고등학생 시절이 옛날이지만.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중 어떤 부분만 쏙 골라서 돌아가고 싶은 거요. 선생님한테 혼났던 순간은 안 돌아가고 싶으니까.”

 그 말을 할쯤에 우기는 장난스러운 표정까지 짓고 있었다. 여자는 여실한 그 표정으로 그 기분 잘 안다는 대답을 꺼냈다. 밥은 그다지 당기지 않는 건지 좀 소복하게 남겨둔 채로 여자는 우기 따라 짧게 웃어보였다.

 “아무튼 그런 기분이 들어서. 이 엠피쓰리로 예전에 많이 듣던 노래가 있거든요. 수험생 시절에도 꾸준히 들었어요. 그 노래를 컴퓨터로 듣다가 문득 다시 그 엠피쓰리로 듣고 싶어진 거 있죠. 그래서 찾아보고 구매했죠.”

 “그랬구나. 노래는 들었어요?”

 “아직요.”

 여자가 다 먹은 그릇을 정리하려는 듯 몸을 일으켰고 그 낌새를 눈치 챈 우기가 더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제가 할게요, 앉아 계세요. 사주셨는데 죄송해서.”

 우기의 말에 여자가 엉거주춤하게 서있었고 우기는 빠른 속도로 그릇을 모았다. 쓰레기와 남은 찌꺼기 같은 것도 한데 모아 비닐에 넣었다. 빠릿빠릿하게 모든 걸 치우며 움직이던 우기가 여자를 쳐다봤다.

 여자는 그런 우기를 보다가 우기 쪽으로 휴지를 건넸다. 우기는 본능적으로 여자를 향해 볼을 내밀었다. 여자는 미묘한 눈빛으로 우기를 바라보다가 가벼운 손길로 우기의 볼을 닦아주었다.

 “그, 변호사님.”

 “네?”

 바깥에 그릇을 내놓고 돌아온 우기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이런 말을 해도 되나, 조금 망설여진 탓에 질문하기를 꺼렸더니 여자 쪽에서 무슨 일이냐는 질문으로 되돌아왔다.

 “말해보세요. 전 의뢰인들 말하는 거 듣는 게 직업인걸요.”

 “노래 들어보실래요?”

 우기는 단어를 뭉개 문장으로 만들어냈다. 다소 중얼거려진 말들, 그 말에 여자는 작게 고개를 갸우뚱하며 답문했다.

 “네?”

 “아니, 그게 아니고, 제 추억의 노래.”

 우기는 문제의 근원인 미키마우스 엠피쓰리를 꺼내들었다. 그래도 기왕 산 건 산 거니까. 이것도 인연인데 새로운 추억을 만들고 싶기도 하고. 여자가 힐끗 엠피쓰리를 쳐다보기에 조금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우기는 여자를 바라봤다. 그쯤엔 여자도 우기를 보고 있었다. 꽂히는 시선이 좋아서 우기는 뜸들이다 말을 꺼냈다.

 “진짜 노래 좋거든요. 밥까지 얻어먹으니까 너무 죄송해서 보답으로… 아니, 그런데 이게 보답이 되지는 않겠네요. 그렇지만 노래 정말 좋아요!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실 것 같아서… 사람들의 노래 취향이 다 같지는 않지만. 하지만 저 이 노래에 제법 자신 있거든요. 제 노래 취향에도 자신 있고? 하하…”

 그런 말을 하다가 보니 어쩐지 자신이 없어져서 우기는 고개를 숙였다. 그 말을 하는 우기 뒤로 여태 들은 말 중에 가장 흔쾌한 여자의 답변이 되돌아온다.

 “좋아요. 저도 좋은 노래 들으면 좋죠. 우기 씨, 유선 이어폰 있어요?”

 “헉, 네!”

 우기가 가져온 백팩에서 이어폰 줄을 끄집어냈다. 엉킨 부분을 풀더니 여자에게 L이라고 적힌 쪽을 건넸다.

 “절 믿으세요. 이 노래 진짜 좋거든요.”

 나머지 R은 우기의 귀에 꽂혔다. 곧 전원을 켜 플레이리스트를 뒤적이며 들려줄 만한 노래를 찾기 시작했다. 재생을 누르자 그 노래가 흘러나왔다. 오로지 기타 소리와 가수의 목소리에만 의존한 노래였다.

 어떻게 들어보면 단순한 노래, 하지만 그 두 개에만 의존했다는 건 그만큼 좋은 노래기도 하다는 반증이었다. 통기타 소리를 제외하고는 정말 그 어떠한 백그라운드 사운드도 없었다. 부르는 가수도 별다른 기교를 부리지 않았다.

 우기도 제법 오랜만에 들은 노래였다. 여전히 가사는 아름다웠다. 멜로디도 좋았고 무엇보다 가수는 여전히 노래를 끝내주게 했다.

 왜 눈물이 날 것 같지. 이건 아마도 좋아서 나는 눈물일 거라고 생각했다. 우기는 본인의 사기 피해 소식에 모였던 친구들이 했던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야, 그래도 우기가 감수성 있고 좋잖아.

 특히 눈을 감고 노래를 감상하는 여자의 모습에 우기는 더 그랬다. 곧 노래가 끝나고 여자는 우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눈물을 떨어트리던 우기는 황급히 눈물을 닦아냈다.

 “왜, 왜 그러세요. 우기 씨, 괜찮아요?”

 “괜찮아요.”

 “왜 또 울어요.”

 여자는 또, 라는 말에 강세를 준 것처럼 그렇게 말했지만 우기는 개의치 않았다. 사실 눈물을 흘리느라 그런 게 신경 쓰이지 않기도 했다.

 “추억의 엠피쓰리로 노래를, 심지어 이 노래를 듣는 게 너무 좋아서요.”

 “아, 좋아서 우는 거예요?”

 “그런데 이걸로 듣고 있으니까 제 십만 원이 떠올라요. 내 십만 원, 이제 없어, 너무 슬퍼. 역시 가서 말하는 게 좋을까요?”

 야, 그래도 우기가 감수성 있고 좋잖아. 안타깝게도 우기는 그 문장 뒤에 왔던 말을 떠올리지 못했다. 그래, 급발진도 참 잘하고 좋지.

 “어딜 가요? 아, 경찰이요?”

 “아니요, 그 판매자한테요.”

 “네?”

 여자의 언성이 또 한 번 높아졌다. 뭐 그런 답답한 소리를 말로 해요, 같은 표정으로 여자는 우기를 훑어 살피고 있었지만 우기는 좀 전처럼 개의치 않았다. 실제로 우기는 감정에 쉽게 졌고, 사람을 쉽게 믿었다. 세상보다 순진한 사람의 특징이었다.

 “가서 한 번 말해봐야겠어요. 설득하면, 뭐, 그래도 들어는 주시지 않을까 하고.”

 “어어, 애초에 이만 원에 팔 수 있는 걸 구만원에 팔고 야무지게 커피 값도 만 원 받아간 사람이 설득을 당할까요?”

 우기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설득이 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이야기는 나눠보고 싶었다. 생각보다 엄청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았으니까.

 “그, 판매자 분 몇 살 정도였어요?”

 “삼십대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 분이요!”

 우기의 대답에 정말 어이없는 장면을 목격한 사람처럼, 혹은 아주 피곤한 걸 목격한 사람처럼 일그러진 표정을 지은 여자가 한참 전보다 훨씬 단호하게 말을 꺼냈다.

 “일단 좀 전에도 말했듯이 목적을 가지고 판 사람이니까 우기 씨가 하는 말을 들어줄 리 없어요. 저는 확신해요. 정말 제 변호사 인생이고 생애고 뭐고 다 걸고 확신합니다.”

 “그렇지만 인상이 선해보였는데. 봐요.”

 우기는 자신의 휴대폰 사진첩을 보여주었다. 제품 사진을 찍기 전 셀카 모드가 되어 있어 실수로 찍힌 사진.

 

 “이런 거 함부로 찍으면 안 돼요, 우기 씨.”

 “제품 사진 찍으려는데 셀카 모드가 돼 있어서 실수로 찍은 사진이에요, 이거.”

 “음. 저기 우기 씨.”

 “네.”

 정말 사기꾼인지 아닌지조차 긴가민가하게 생긴 평범한 얼굴, 여자는 그 얼굴을 가만 보다가 혀로 입술을 한 번 훑고 우기를 향해 질문했다.

 “그 사진 저 한 번만 더 보여주실래요?”

 우기는 순수하게 그 사진을 다시 보여줬다. 기억을 떠올리는 듯 인상을 찌푸려보던 여자가 책상 서랍을 열어 파일 철을 꺼냈다. 샛노란 레몬색의 파일 철, 그 속엔 모아놓은 서류들이 있었다.

 “우기 씨, 이것 좀 봐요.”

 곧 찾으려던 사람을 찾은 듯 여자는 우기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 꼿꼿한 손가락질, 여자의 검지가 가리키는 곳엔 그 남자가 있었다.

 “헉! 저랑 거래했던 그 사람이네요!”

 “밑에 글자 보이죠? 초범 아니고 몇 번 씩이나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에요. 게다가 잡혔을 때 공범도 많았고. 이 수배 서에 있는 사람들은 사기범들 중에서도 위험해요. 다른 범죄를 병행해서 하는 사람들이고, 경찰들도 찾으려고 난리니까. 작은 사기로 끝난 걸 오히려 다행으로 아세요. 찾아가지 마시고요. 전화번호도 지우세요. 아시겠죠?”

 “네, 네, 꼭 그럴게요.”

 우기는 백팩을 챙겨 들었다. 잠시만요, 잠깐 우기를 돌려 세우는 여자에 의아해하는 사이 우기의 손엔 사탕과 과자 같은 게 잔뜩 쥐어졌다. 이런 개인 사무실에서 쓰는 냉장고가 으레 그렇듯 에너지 소비 효율 삼 단계쯤 된다는 스티커가 붙어 있는 냉장고에서 캔 음료도 하나 빼온 여자가 우기의 손에 캔 음료까지 쥐어주었다.

 “조심해서 가고 꼭 시킨 대로 해요. 허튼 생각 말고.”

 우기는 그 말에 걱정하지 말라며 웃었다. 어떻게 상담 비용이라도 드려야 하냐는 물음에 다 고사하고 제발 그런 거 하지 마세요, 라는 단호한 여자의 답이 돌아왔다. 우기는 볶음밥을 먹으며 그러했듯 감사하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사무실을 떠났다.

 

 B.

 

 우기는 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사무실을 빠져 나오기 전, 상담 카운터에서 챙겼던 명함에 적힌 번호를 휴대전화로 찍으며 우기는 걱정했다.

 요새 스팸 전화가 기승이라서 낯선 번호로 오는 전화 잘 안 받던데, 처음엔 그 우려가 맞아 떨어진 듯 상대측에서 전화를 받지 않았지만 그런 우려가 무색하게 곧 전화가 다시 걸려왔다.

 “여보세요.”

 “네, 어디에서 전화 주셨을까요?”

 가다듬는다고 가다듬은 것 같지만 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를 들으며 우기는 상대가 잠에서 막 깬 상태라는 걸 눈치 챘다. 본론부터 꺼내기 위해 우기는 상대보단 발랄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전소연 변호사님 맞으세요?”

 “네, 제가 전소연 본인입니다.”

 “아, 변호사님! 저 우기예요! 삼일 전에 왔다 갔던.”

 “아, 우기 씨! 어쩐 일이세요?”

 다행히 스피커를 통해 들려온 음성은 우기를 기억한다는 것처럼 다소 반가움을 띄고 있는 목소리를 하고 있었다. 우기는 스스로에게 되돌아온 질문에 조잘조잘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혹시 오늘 출근하시면 사무실에서 물건 좀 찾아봐주실 수 있으세요? 저 교통카드를 잃어버린 것 같아요. 항상 바지 뒷주머니에 넣어서 잃어버릴 수가 없는데,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게 변호사님 사무실이어서요. 시간 되시면 찾아봐주실 수 있는지 해서요. 금액이 좀 많이 들어서, 하하.”

 우기는 머쓱하게 웃었고 상대는, 그러니까 소연은 여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침착하게 답문해줬다.

 “오늘 출근일은 아니지만 급하면 찾아봐줄 수 있어요.”

 “아니요, 그렇게 급한 건 아니에요! 저 오늘은 받으러 갈 시간도 안 되고요.”

 “주말이니까 아르바이트 하나요?”

 “아니요, 오늘은 안 하는데. 약속, 약속이 있어서!”

 “무슨 약속인데요?”

 흐름상 자연스러운 질문이었다. 이 질문이 나올 줄 모르고 우기는 그렇게 말한 자신을 후회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아 수화기 너머로 침묵 상태가 유지 되었다. 우기는 생각보다 더 정직하고 거짓말을 못하는 사람이었으므로 소연의 질문에 무슨 답을 해야 할지 한참을 망설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쯤엔 소연도 이 정적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인지 소연의 말로 정적이 먼저 깨졌다. 예상외로 들려오는 말이 꽤나 길었다.

 “이거 그냥 제 직업병이라 물어보는 건데, 노파심 같은 건데, 우기 씨 불법적인 아르바이트 하는 건 아니죠? 뭐라고 하려는 게 아니라 진짜 그냥 직업적으로 걱정이 돼서. 어른이라 그런가 걱정이 막 돼서.”

 “네?”

 우기는 그 말을 듣고는 와하하, 웃어버렸다. 걱정할 만한 그런 일은 하지 않지만, 그래도 숨겨야 하는 일이 있었다. 있었는데,

 “아니요! 저 그런 거 안 해요, 하하. 저 그냥 돈 다시 돌려받으… 러…… 아, 망했다.”

 우기는 자기도 모르게 숨기려던 일을 입 밖으로 내버렸다. 항상 이랬다. 다시금 그 사기 피해 위로 모임의 친구들 말을 인용해보자.

 “우기는 진짜 가끔은 어디 내놓으면 걱정 돼, 이게 장점이라면 장점이고 단점이라면 단점인데 순진해서.”

 이윽고 터져 나오던 웃음소리들을 기억한다. 우기는 그때 아니라고 그렇게 부정을 했었지만 지금쯤엔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스피커에선 소연이 요리를 하던 중이었는지 기름 튀는 소리만 작게 들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곧 소연의 한숨 소리가 짧게 들려왔다.

 “우기 씨. 제가 그 때 분명 위험하다고 말씀 드렸던 것 같은데요.”

 “아니, 그래서 저도 만날 생각까지는 없었고. 카톡으로 여쭤봤는데, 죄송하다고 반성하신다고 돈 돌려드린다고 하셔서.”

 “그런데 왜 만나요. 계좌이체 할 줄 모른대요, 그 사람이?”

 “사죄의 의미로 다른 것도 준다고, 꼭 얼굴 보면서 사과하고 싶대서.”

 여전히 한숨에 가까운 말을 하고 있긴 했지만 우기는 애써 떳떳한 척 답했다. 뭣하면 나도 어른이고, 폰도 챙겨갈 거고, 경찰도 부를 거니까. 세상을 잘 믿는 사람들은 때때로 저런 착각을 하곤 한다.

 “어디서 만나기로 했어요.”

 “진짜 걱정 마세요!”

 우기는 그 말을 끝으로 특정 구에 있는 공장 단지 속 공장 이름 하나를 태평하게 대었다. 이름 대면 그 동네 주민 대부분은 아는 곳이었다.

 거기서 만나기로 했고 저녁 여섯 시인데다가 사람이 많을 거란 말을 허겁지겁 내뱉던 우기가 마무리로 안심하란 말을 날리는 동안 소연 쪽에선 작은 한숨 소리 같은 게 들렸다.

 “아니, 저기.”

 “교통카드 찾아보시고 연락 주세요. 저는 지하철 타야 해서 그럼 이만!”

 사실 지하철이 오려면 조금 남았다고 스크린에 떠있었지만 더 이상 통화를 할 배짱이 없어서 우기는 서둘러 전화를 끊어버렸다. 어쨌든 우기는 그 사람을 믿어보기로 했다.

 우기는 잃어버린 교통카드에 붙여진, 스티커에 적힌 그 말을 곱씹어본다. no te rindas nunca, 포기하지 말라는 뜻의 스페인어였다. 언젠가 보고 인상 깊어 네임 스티커로 만들어 붙인 말. 이번 한 번쯤은 정말로 괜찮지 않을까?

 우기 사전에 포기란 없었다.

 

 * * *

 

 저녁 다섯 시 오십 분, 우기는 일찍이 약속 장소에 나와 남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쯤에 전화가 한 번 울렸는데, 소연이었다. 가장 일찍 걸었던 전화라 딱히 저장되어 있진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소연의 번호라는 걸 우기는 알 수 있었다.

처음엔 받지 않을까, 하고 고민도 했었는데 안 받으면 걱정할 것 같기도 하고 이미 이 약속에 나온다는 사실을 말해버렸으므로 우기는 전화를 받기로 결심했다.

 무슨 말을 할까, 우기가 망설이는 사이 소연은 인사도 생략하고 어디냐고 물었다. 조금 급한 목소리, 우기는 아주 잠시 의아해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 남자 분, 기다리는 중이에요.”

 “아직 안 왔어요?”

 “네, 아직이요. 생각보다 늦네요.”

 “금방 도착할 테니까, 최대한 기다리고 있어요.”

 “네? 무슨 일로 오시는.”

 “혹시 그 남자랑 얘기할 동안 법률적으로 도움 필요한 일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갈게요. 도와줄게요, 아는 언니라고 해요.”

 “그럼 죄송한데, 와주실래요? 자꾸 도움만 받는 것 같아 가지구. 빨리 오세요!”

 우기는 그 이야기를 하며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은 건 오 분 정도가 지난 저녁 여섯 시쯤. 우기는 괜스레 손들을 비비적대며 발을 굴러봤다. 남자가 언제쯤 오려나, 뭐 그런 생각이나 좀 하면서.

 

 * * *

 

 날은 점점 어두워졌다. 여섯 시 이십 분쯤, 남자는 다른 남자 한 명을 데리고 모습을 드러냈다. 거기에서 살짝 불안함을 느꼈지만 이미 약속 장소에 나온 건 어쩔 수 없었다. 소연에게 한 연락 같은 건 없었다. 어쨌든 오신다고 했으니까, 오면 얘기가 다 끝나겠지, 같은 막연한 생각이 우기의 머릿속에 가득 차있었던 까닭이다.

 우기에게 남자 둘이 다가왔을 땐 꽤 먼 거리부터 걸어왔는지 여섯 시 이십오 분 정도가 되어있었다. 순간 불안해진 마음에 휴대전화를 살폈던 우기가 알 수 있는 건 시간뿐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안녕하시겠냐?”

 거래할 때와는 영 다른 빈정대는 말투와 목소리. 그 옆에 낀 남자는 요리조리 동태를 살피느라 바쁜 것 같았다. 우기는 밀리고 싶지 않았으나 남자의 발걸음에 서서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왜 이러세요.”

 “그럼 넌 왜 그러는데? 좆같게, 계집애가 이미 준 돈 뺏으려고 따박따박 카톡질이나 하고.”

 그러면서 남자는 우기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가죽 장갑을 낀 매끈한 손이 투박하게 우기의 목을 졸라매고 있었다. 숨통이 조이는 탓에 헛기침이 쏟아지듯 튀어나왔다. 눈이 빠질 것 같아서 우기는 눈을 감았다.

 “꼴좋다.”

 그런 말을 해대며 목을 조르는 남자를 향해 다리를 버둥거렸다. 팔꿈치로는 허리를 때리려고 애썼다. 원데이로 들었던 호신술 강좌에서 배운 게 떠오른 탓이었다. 눈을 뜨지 못해 어디쯤을 때리고 있는지는 차마 가늠할 수 없었지만.

 “이 꼬마 완전 바보 아냐.”

 그런 말을 하는데 우기는 쉰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숨이 한계에 달했던 탓이다. 그리고 그쯤 우기는 발자국 소리 같은 걸 들은 듯 했다. 곧 목을 조르던 남자의 손은 힘이 살짝 빠졌다. 일찍이 정찰을 서던 남자는 바닥에 쓰러진 채였고, 짝하는 소리와 함께 슬리퍼 한 짝이 남자의 주변을 나뒹굴고 있었다.

 우기가 눈을 뜨고 앞을 봤을 땐 소연이 존재했다. 이게 뭐지, 하는 사이 소연이 남자의 오금을 발로 걷어찼다. 잠시 힘이 빠졌던 남자가 우기를 인질로 삼으려는 듯 다시 낚아채려는 사이 소연이 남자의 목을 움켜잡았다.

 손의 뼈가 도드라지고 가늘던 팔의 근육이 단단해졌다. 꽉, 점점 조여지는 소연의 손에 남자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리고 남자가 어떤 말을 꺼내려는 사이 남자는 내던져졌다. 소연이 그 팔로 남자를 집어던진 탓이었다.

 남자는 십 미터 정도를 날아가다 건물 벽에 부딪혔다. 쾅 소리와 함께 바닥을 굴렀다. 우당탕, 주변에 있는 것들이 쓰려지고 남자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벽이 우그러질 정도였으니까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한 우기가 감사인사를 하기도 전에 소연은 우기를 부축하듯 안아들었다.

 “우기 씨, 괜찮아요?”

 물론 감사인사를 하기엔 너무 놀란 상태긴 했지만, 우기가 토끼 눈을 하고 저를 안아든 소연을 쳐다봤다. 기절할 뻔하긴 했는데 어쩌다 보니 이 광경은 생생히 보고야 말았다.

 “괜찮아요?”

 소연이 한 번 더 우기를 향해 괜찮으냐고 물었고, 우기는 손가락으로 소연을 가리키며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변호사님, 사람 아니죠?”

 “아니, 그게 말이죠.”

 곤란한 걸 들킨 사람처럼 남는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 쥔 소연이 우기처럼 말을 우물거렸다. 우기는 짐짓 심각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제 큰일 난 거 아니에요?”

 “네?”

 “저, 저 때문에 정체를 들키면 어떻게 해요? 여기 씨씨티비 같은 게 있다거나 해서 들키면. 죄송해요, 저 때문에 또.”

 “그건 걱정 안 해도 돼요. 애초에 이놈들이 이러려고 불렀으면 씨씨티비도 없는 곳일 텐데.”

 소연의 말에 우기는 입술을 꾹 물었다. 우기는 이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냥, 멋있다고 생각했다.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인영 같은 게 보였다. 우기는 그 모습을 보다가 느릿하게 일어서 발을 디뎌 봤다.

 “혹시 정의의 히어로 같은 건가요? 막 초능력이 있는.”

 “아니, 그런 쪽팔린 거 절대 아니니까 헛소리 하지 말아요.”

 “그럼 뭔데요?”

 “여기에 더 있을 수는 없으니까 일단 가요. 아, 도로변이 어느 쪽이지.”

 소연이 앞서 나가는 사이 우기는 절뚝이며 걷고 있었다. 소연을 따라잡기엔 역부족인 속도였다. 그런 우기를 향해 뒤돌아본 소연이 그렇게 물었다.

 “왜 이렇게 늦어요.”

 “저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요. 너무 긴장했나 봐요.”

 “그런 건 미리 말을 해줘야죠.”

 소연이 이번에야말로 우기를 안아들었다. 우기를 안아든 채로 사람들이 못 보는 골목 사이로 빠르게 뛰어갔다. 소연은 대로변 근처에 도착해 우기를 바닥에 내려 주었다.

 “저희 방금 스쿠터 탄 거 아니죠?”

 우기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그런 말을 했다. 우기를 내려주고 소연은 한참이나 휴대전화를 만지고 있었는데, 아마 택시를 불렀던 행동인 듯 곧 둘이 서있는 대로변 쪽으로 택시 한 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스쿠터가 아니고 앰뷸런스겠네. 들것 같은.”

 “조용히 하고 제발 좀 타세요.”

 우기는 진지했으나 소연은 그러지 못했다. 소연은 우기를 택시 안에 태우며 본인 몸도 집어넣었다.

 “데려다줄게요.”

 “그래요, 기사님 저희.”

 우기는 순순히 자신의 집 주소를 읊었다. 택시가 출발했다. 역시 어른 말은 듣는 게 좋은 편이라는, 소연 입장에선 답도 없는 생각을 하다 우기는 본인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흔들리던 고개가 안정을 되찾은 데엔 소연의 빳빳한 어깨가 있었다는 걸 우기는 잠에서 깨고서야 알았다.

 

 * * *

 

 우기의 자취방에 도착했다. 소연은 우기를 방 안까지 부축해주었다. 우기는 아닌 척 제 집을 힐끗대는 소연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요?”

 “그래서라뇨?”

 우기의 말에 방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소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에 우기가 반쯤 실소하며 말을 꺼냈다.

 “히어로가 아니면 뭔데요? 엄청 빨리 움직이고 사람을 냅다 들어서 날리던데 그게 초능력이 아니에요?”

 “음.”

 소연은 우기를 향해 고민하는 모습을 내보였다. 우기는 소연이 어떤 말을 해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허무맹랑하게 사실은 저 파워레인저예요, 그런 말을 해도 변호사님이 레드예요? 같은 질문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우기 씨, 있잖아요. 저 뱀파이어에요.”

 “에?”

 “뱀파이어. 흡혈귀. 우기 씨가 생각하는 그거. 농담 아니고…”

 “헐! 그럼 몇 살이세요?”

 생각해봤던 목록 중에 있던 정체였다. 우기는 그런 질문이나 했다. 의외의 질문을 받았다는 듯 소연은 잠시 헛기침 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기억이 잘 안 나요. 몇 천 년 살았어요.”

 “마, 말 놓으세요.”

 “네?”

 “그 정도면 말 놓는 게.”

 소연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런 소연을 바라보고 있던 우기는 그 누구보다 진심이었다. 이 사람이 말을 안 놓으면 어느 누가 나한테 말을 놔?

 한창 고깃집 알바를 할 때 오십 대 개저가 딸 같아서 그래, 하던 때도 그럼 용돈 줘, 하고 유연하게 넘겼던 우기였으니까 사실 말 놓는 것쯤은 별 거 아닌 행동이라는 것이다.

 “그럼 우기 씨도 편하게 저 언니라고 불러주세요.”

 “네, 언니!”

 사실 우기도 그러고 싶었다. 일종의 사심이었다. 험한 일에서 구해준 사람이 언니고 내 사랑이고 그런 거지. 물론 처음부터 소연의 얼굴이 마음에 들었다는 감상을 했었던 우기니까 이 전개가 영 말이 안 되는 전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 우기야. 오늘 험한 일 많이 당해서 무섭고 힘들 텐데 이제 그만 자. 나도 집에 가봐야겠다.”

 “왜, 왜요?”

 “왜냐고?”

 “저 물어볼 거 완전 많은데.”

 “안 피곤해?”

 “아직은.”

 “그런 일 당했잖아. 저기, 그, 실례지만 무섭거나 불안하지 않아? 걱정이 돼서 그래. 혹시 혼자 있는 게 더 무서운 거면…”

 “아니. 진짜로, 진짜로 괜찮아요. 처음에는 조금 무서웠지만.”

 “정말이지?”

 “언니가 와서 구해줬잖아요. 고마워요, 이번에도 도와주셨고. 아무튼 결과적으로는 다 잘 됐잖아요? 저도 무사하고 언니도 무사하잖아요. 그러면 됐어요. 기분 좋으니까 됐어요.”

 침대에 걸터앉은 우기가 소연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우기는 본인을 보며 소연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늠은 못했지만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고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소연의 얼굴이 꽤 빨갰던 탓이다.

 

 “그래. 그럼 질문이 뭔데. 해봐.”

 “뱀파이어면 막 밤에 사람 사냥해요?”

 “요즘 세상에 누가 그런 야만스러운 방식을… 넌 배고프면 산에 가서 매머드 잡니?”

 “매머드가 뭔데요?”

 “매머드 몰라?”

 “네.”

 “큰 코끼리 말이야.”

 “네?”

 “아니, 그러니까, 매.머.드 몰라?”

 “네.”

 “매머드를 모른다고? 기다려.”

 소연은 잠시 처음 미키마우스 엠피쓰리의 존재를 알렸던 우기를 보던 표정을 지었다. 매머드 같은 거 몰라도 잘 살지 않나, 저렇게까지 놀랄 일이야?

 우기는 중학교 과학 시간에 대부분 잠을 택하는 학생이었으므로, 소연의 반응에 속으로만 꿍얼대고 있었다. 우기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소연의 말 뒤로 잠시 기다렸다. 소연은 곧 휴대전화 검색 엔진 화면을 우기 쪽으로 내밀었다.

 “매머드 이거야. 과학시간에 잠만 잔 거 티내니?”

 “어떻게 알았어요?”

 우기의 화들짝 놀란 그 질문에 소연은 아무런 말도 않고 잠시 헛웃음을 쳤다. 우기는 뭔가 관통 당한 기분이라서 입맛을 한 번 다시고 말이 이어지고 있는 소연을 쳐다봤다.

 “얘기가 튀어나갔네. 아무튼 그런 짓은 하지 않아. 예전이라면 힘을 보충해야할 일도 많고 길거리 사방천치에 범죄자들도 돌아다녔으니 사냥이나 뒷정리도 손쉬웠지만. 이제는 기력이 남아돌아도 쓸 데가 없고 아무나 잡아갈 수 없는 세상이니까. 무고한 사람들 사냥하고 싶지는 않거든. 생고기나 레어 스테이크 먹는 정도로도 해결할 수 있어. 굳이 먹고 싶어 못 참겠는 때가 오면 아는 사람들에게 연락하면 돼. 혈액팩 한 개 정도는 얻을 수 있고.”

 “약간 금연이랑 비슷한 느낌인가.”

 “아마도. 항상 먹고는 싶지. 그런데 굳이 필요하진 않고. 요즘 세상에는 힘을 백 퍼센트 발휘할 일이 없거든. 그리고 대체 어느 누가 피 빨리는 자원봉사를 당해주겠어.”

 “아까 사람 던진 게 최대치가 아니었어요?”

 “당연하지.”

 소연은 자연스럽게 우기의 옆에 앉았다. 사실 엄청 자연스럽게 앉은 건 아니었고 우기의 옆자리를 한참이나 힐끗대다가 우기의 옆자리를 택했다. 매트리스가 소연의 무게만큼 눌렸다.

 “박쥐로 변할 수 있어요?”

 “아니.”

 “삼일 전에는 낮에도 영업 잘하셨잖아요. 햇빛 아래 있어도 괜찮아요?”

 “심한 햇빛 아니면 어느 정도는 견딜만해. 햇살을 오래 받으면 가렵거나 따갑기는 하지. 입술처럼 예민한 부위는 여름에 터져서 피 나기도 해.”

 “마늘이랑 십자가는요?”

 “너 참 전형적인 질문을 하는구나. 마늘은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식품이 아니라서 그냥 잘 안 먹어. 십자가는 전혀 상관없어. 일단 나 무교인데다가 딱히 사악한 존재도 아닌걸. 타격 없어.”

 “제 목을 물면 혹시…”

 “안 죽어.”

 “그러면…”

 “네가 뱀파이어 되지도 않고.”

 소연이 우기를 힐끗 쳐다봤다. 우기는 다소 실망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랄까, 진짜 다 관통 당하는 느낌이네.

 “그렇게 실망한 표정 짓는 이유가 뭐야?”

 “아니, 질문을 꿰뚫어보는 것 같아서.”

 “많이 들어봐서 그래. 정말 많이 들어봤거든, 지금 네가 하는 질문들.”

 “그러면 뱀파이어는 우연히 생기는 거예요?”

 우기가 넌지시 질문했고 소연은 그 질문은 의외였다는 듯 잠시 눈을 크게 키우며 혀로 아랫입술을 훑었다. 소연의 입술이 침으로 잠시간 반짝였다.

 “피를 빼앗기는 게 아니라 받으면 될 수 있어.”

 “네?”

 “뱀파이어의 피가 섞이면 뱀파이어가 되는 거야. 그러니까, 내 피를 수혈 받거나 마시면 될 수 있어.”

 “언니도 그럼 누군가한테 피 줘본 적 있어요?”

 우기의 눈이 빛났다. 진짜 신기하다. 그러면서 우기는 트와일라잇의 한 장면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런 우기 생각 훤하다는 듯 다가오는 우기의 얼굴을 향해 소연은 손가락을 내밀었다. 곧 우기의 동그란 이마에 맞닿은 소연의 손가락은 우기의 이마를 가볍게 밀어냈다.

 “응. 딱 한 번. 있어.”

 “어땠어요?”

 소연은 웃고 있었지만, 우기는 본능적으로 그게 즐거워서 웃는 건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다. 꽤 쓸쓸해보였으니까, 소연은 한참 전의 기억을 회상하는지 꽤 긴 정적을 유지했다.

 꼭 소연이 무슨 약속이냐고 묻고 난 뒤의 침묵처럼 한참이나 말이 이어지지 않아 우기는 질문이 껄끄러웠냐고 묻고 싶어졌다. 곧 소연의 고개가 우기 쪽을 향해 돌아 차마 물어볼 순 없었지만.

 “잘 안 됐어. 그게 다야.”

 “그래요?”

 “응.”

 간단한 대답을 꺼내는 것치곤 소연은 심연에 잠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소연이 입을 한 번 벌렸다 다물었다. 그리고 곧 우기를 향해 질문했다.

 

 “다른 질문은 없어?”

 “음.”

 우기의 음 소리는 한참을 이어졌다. 말문이 막힌 탓이었다. 질문 없으면 간다고 할 줄 알았는데, 소연은 의외로 인내심 있게 우기가 고민하는 것을 기다려주었다.

 “천천히 생각해봐, 너 궁금한 거 엄청 많은 것 같은데.”

 그 말을 하면서 소연은 아주 살짝 웃었다. 은은한 미소로 우기의 집안을 둘러보기도 하고 우기의 표정을 살피기도 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소연은 늘 자상하다고 우기는 생각했다.

 삼일 전 소연 법률 사무소에서도 볶음밥 곱빼기로 먹어도 된다며 웃던 그 얼굴이, 제 눈 밑을 닦아주던 손길이 너무 세심했기 때문에.

 “제가 보답으로 밥 한 끼 사드려도 될까요?”

 소연은 그 질문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제법 흔쾌한 반응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또 하고 싶은 말이, 아.

 “손수건은 그 때 돌려드릴게요”

 정작 소연은 잊고 있었던 듯 소연의 눈이 또 커졌다. 딱히 안 받아도 상관없긴 한데, 그런 문장을 꺼내다가도 소연은 그래, 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또 질문.”

 “뭔데.”

 “뱀파이어들은 원래 그렇게 다 멋있어요?”

 “뭐?”

 별안간 소연의 귀가 빨개졌다. 우기는 빨개진 소연의 귀를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의외로 부끄럼 타시나보네.

 “아니, 목 딱 꺾을 때 엄청 멋있던데. 그러더니 사람 목을 잡아서 날려버리고. 영화 보는 줄 알았어요.”

 “다른 뱀파이어들도 그 정도는 해.”

 “전 멋있냐고 물어봤는데요.”

 “난 잘 모르겠는데……”

 소연은 고개를 숙였다. 우기가 소연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소연을 바라봤다. 소연은 어깨를 들썩이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소연은 점점 더 빨개지고 뜨거워졌다. 아무래도 뱀파이어다보니 찬 몸에서 뜨거워지는 거라 좀 미적지근한 정도가 다였지만.

 몇 천 살 먹으면 보통 능구렁이가 되지 않나, 우기는 그런 생각을 하며 잔뜩 달아오른 소연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봤다. 나보다 나이 덜 먹은 사람처럼 굴고 있잖아. 우기는 뒷말은 유연하게 삼켰다. 귀여워.

 “그럼 다른 질문.”

 “뭐…”

 “저를 해치려고 한 사람의 돈을 훔치면 경찰서 가야하나요?”

 우기가 그 말을 하며 주머니에서 만 원짜리 다발을 꺼내들었다. 꽤 큰 액수, 소연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너 그거 어디서 났어?”

 “아까 언니가 기절시킨 사람 지갑.”

 “어, 언제?”

 “언니가 대로변 찾는다고 두리번거릴 때. 지갑이 바닥에 떨어져서 펼쳐져 있던데요. 날아가면서 떨어졌나 봐. 그래서 뭐, 그 사람들이 제 목 조른 만큼의 값은 아니지만 엠피쓰리 값은 되겠다 싶어서.”

 “너…”

 “제가 좀 약아빠졌죠?”

 그런 말을 하면서는 우기 스스로 눈초리를 좀 내리고 있었다. 약아빠져서 별로예요? 그런 질문을 하면서 우기는 소연을 쳐다봤다. 반쯤은 장난인 우는 소리를 내면서 우기는 소연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냐. 뭐, 이번엔 특수한 경우니까. 그럴 수 있지. 돈 잘 간수해.”

 우기는 소연의 얼굴이 어째선지 더 빨개졌다는 걸 느꼈는데 그냥 아무 말 않기로 했다. 소연은 우기의 손에 쥐어진 돈 뭉치를 보다가 말을 꺼냈다.

 “위조지폔지 아닌지 검사해줄게.”

 그런 말을 하면서 소연은 우기가 지갑에 돈을 집어넣기 전에 돈을 한 번 검사해주었다. 진짜 돈이라는 말에 우기는 웃으며 그랬다.

 “고마워용.”

 즐겁기라도 한 것처럼 꽤 높은 톤의 목소리, 소연은 그런 우기를 보면서 헛웃음을 쳤다. 우기는 그런 소연을 보다가 그냥 헤헤 웃고 말았다.

 “시간 늦었으니까 이젠 진짜 가봐야겠다. 네가 대접해준다는 식사는 날짜 천천히 잡아보자. 오늘은 진짜 푹 쉬어. 늘 조심하고.”

 “네, 언니도.”

 우기가 소연을 현관 앞까지 배웅했다. 소연이 신발을 다 신고 문을 열었다. 손을 흔들어주던 우기가 아차 하며 소연의 손목을 잡았다. 손목이 잡힌 채로 몸을 반쯤 돌린 소연이 무슨 일 있냐고 물었다. 걱정스러워하는 톤에 우기가 웃었다. 그쯤엔 우기의 볼도 익어있었다.

 “저 마지막으로 딱 한 가지만 더 물어봐도 돼요?”

 “뭐든지.”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예요.”

 우기의 입술이 움직였다. 낮은 목소리가 한 글자씩 들려올 때마다 소연의 얼굴색이 달아올랐다. 듣는 동안 부끄러워진 소연이 손을 빼려 했지만 우기의 손힘이 생각보다 강했다.

 질문에 왜 대답이 없냐며 우기가 웃었다. 웃는 본인도 정작 질문이 쑥스러워서 시선이 튀고 난리가 났다.

 

 “못 알아들었으면 다시 말해줄까요.”

 소연은 여전히 얼굴이 빨간 것으로 보아 부끄러워하는 게 뻔했지만 큰 부끄러움은 의외로 용기를 준다. 소연은 새빨개진 얼굴을 한 채로 우기의 눈에 시선을 맞춰왔다.

 우기가 놀라 몸을 살짝 뒤로 빼자 잡힌 손을 세게 당겼다. 우기는 진짜 뱀파이어 힘세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소연의 말에 얼굴이 붉어졌다.

 “대답해줄게, 또박또박 말해봐.”

 우기가 홀린 듯 소연에게로 다가갔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이윽고 우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뱀파이어도 연애를 하나요?”

 느릿하게 흐르는 우기의 물음에 소연은 짤막한 말로 답했다. 응. 소연은 우기의 팔을 당겨왔고, 둘의 숨은 인중쯤에서 맞닿았다. 소연의 팔이 우기의 허리너머로 천천히 감기고 있었다.

 촌스럽게 누런 색상인 우기의 자취방 현관 센서등이 몇 번이나 꺼지고 켜지길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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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mpire

Composite Authorsh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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