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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듀부멘탈 (@tofumental59)​ → 덕팸 (@Im_DuckPam) 외전

 <​암막커튼>

 우리는 어디로 가서 어디에 닿을까.

 

 소연이 발견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우기는 다 적은 편지를 한 데 묶어 산소에 두고 왔다. 딱히 상자에 넣거나 하지는 않고 비석 근처에 두었다. 바람에 날려 날아가거나 비를 맞아 기록이 지워진다 해도 상관없었다. 발견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으니까.

 우기는 공동묘지를 벗어나며 앞으로 어떻게 할지 생각했다. 이 집을 떠날까. 아니면 아예 이 지역 자체를 떠날까. 묘지 근처에 있는 공원에 도착한 그녀는 벤치에 앉았다. 한참을 말없이 앉아있었다.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냥 죽을까, 라는 생각도 해봤지만 역시 아직까지는 죽고 싶지 않았다. 정말 이기적이다. 우기의 입에서 비실비실 웃음이 흘러나왔다.

 언니 손에는 죽고 싶은데 스스로 죽기는 싫어?

 우기는 자리에서 일어나 공동묘지 쪽으로 되돌아갔다. 걷는 속도가 점점 빨라져 뛰는 모양새가 되었다. 이렇게 이기적인 사람의 글 따위는 없는 게 낫다. 얼마나 짜증날까. 이기적인데다가 바보이기까지 하다고 생각하겠지, 설령 언니가 발견하지 못한다 해도. 누군가 발견한다면, 누군가 읽게 된다면. 우기는 다리를 길게 뻗으며 뛰었다. 공동묘지 입구의 철문을 어깨로 밀며 지나갔다. 그런 기록은 세상에 없는 게 낫다.

 나 혼자만의, 기록에 불과한 그런 건

 

 뛰어가던 우기의 발걸음이 멈췄다. 공동묘지에 한 여자가 서있었다. 손때 묻은 편지를 읽고 있는 여자의 표정이 제법 진지했다. 우기는 자연스럽게 뒷걸음질 쳤다. 그 여자는 아직 우기를 발견하지 못했는지 손에 든 종이를 한 장씩 넘기고 있었다. 우기는 종이에 고개를 처박고 있는 그 모습을 본 순간 여길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그 시간은 아주 잠깐이었지만.

 오랜만에 본 얼굴이 너무 좋아서 조금만 더 관찰하고 싶었다. 그래도 떠나야지. 최악의 상황이 되는 것보다는 뭐든 나았다. 우기는 다시금 뒷걸음질 쳤다. 급하게 몸을 트는 바람에 애꿎은 비석에 오금을 부딪쳤다. 비석과 부딪히며 발을 구르는 소리가 제법 크게 났다. 여자가 우기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답지 않았다. 정말 평소답지 않았다. 차분히 떠날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넘어질 것처럼 비틀대던 우기가 몸을 겨우 가눴다. 자신을 쳐다보는 여자의 눈이 커졌다. 그걸 견딜 수 없었던 우기는 그대로 도망치려 했다. 몸도 마음도 평소와는 달랐다. 모든 게 급박했고 서툴렀다.

 “또 도망쳐?”

 그 말에 우기는 여자를 쳐다봤다. 여자가 편지를 들어보였다.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게 우기를 도망치지 못하게 했다. 원망과 억울함, 슬픔과 기쁨, 역겨움과 익숙함. 지금 내 표정도 저만큼이나 복잡할까. 우기는 여자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지만 또 도망치냐고 묻는 여자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저 손에 죽고 싶다는 생각으로 오랜 시간을 살아왔는걸. 우기는 소연의 말을 거스를 수 없었다. 손은 왜 떠냐고 중얼거리며 우기는 소연에게로 다가갔다.

 우기가 소연의 앞에 섰다. 너무 가까이는 서지 않았다. 이렇게 일부러 거리를 유지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우기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사랑했단 사실만으로도 제법 괜찮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죽고 싶은 기분 따위 들지 않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소연의 얼굴을 실제로 보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문제의 원인이 눈앞에 있었다. 우기는 소연에게 사랑스러움을 느낌과 동시에 그 손에 죽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소연은 한 동안 말이 없었다. 말없이 편지지를 펼쳐 다시 훑어보더니 주먹을 쥐었다. 우기는 그런 소연을 가만히 쳐다봤다. 두 사람은 비석 앞에 조용히 서있었다. 의외로 먼저 입을 연 건 우기 쪽이었다.

 “다쳤어?”

 그 말에 화들짝 놀란 소연이 어깨를 떨었다. 우기가 슬프게 웃었다. 내가 무서워? 그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하지 않았다. 나도 내가 싫은데 언니라고 어련하겠어.

 “다친 건 아냐. 신경 쓰지 마.”

 우기가 가리킨 곳은 소연의 귀 뒤쪽이었다. 헌터의 문신이 있어야 하는 자리. 그 자리에 전체적으로 드레싱이 붙여져 있었다. 다친 것도 아니면 드레싱을 왜 붙였나 싶고, 조금은 걱정이 되었다. 조금? 아니지. 사실은 아주 많이 걱정되었다. 그렇지만 본인이 지금 소연의 눈에 어떤 존재로 보이는지 알 수 없어서, 우기는 코트 주머니에 조용히 손을 찔러 넣었다.

 “너는 거짓말쟁이일지 몰라도 나는 거짓말 안할 거야.”

 그 말을 하는 소연의 손톱 밑에 새하얀 가루들이 달라붙어 있었다. 수정 테이프가 떼어져 너덜너덜해진 종이를 보며 우기는 웃었다. 거짓말쟁이라고 적힌 글자가 선명하게 보였다. 가려도 소용이 없었다. 떼어내면 그만이네, 라고 중얼거리자 소연이 귀 뒤에 붙어있는 드레싱을 떼어냈다. 거즈에 붙은 작은 핏자국이 보였다. 사실 보기도 전에 냄새가 먼저였다. 소연이 귀를 접어 그 뒤를 보여줬다. 칼자국에 훼손된 문신이 보였다. 그걸 본 우기가 눈살을 찌푸렸다.

 “누가 그랬어?”

 우기의 눈에 잠깐이나마 적의가 흘렀다. 이제 가져봤자 필요 없는 소유욕도 함께였다.

 “내가.”

 소연은 그 말을 하고 웃었다. 터진 웃음을 참지 못 하고 한참을 웃어댔다. 대개는 아물어 있었지만 칼자국의 수가 그리 적은 것도 아니었다. 얕은 찰과상 정도라고는 해도 몹시 아팠을 것이다. 소연은 허리까지 꺾어가며 웃었다. 그 때문에 아문 상처들의 일부분이 찢어져 피가 났다. 소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것을 닦아냈다. 우기는 진동하는 피 냄새를 맡으며 소연을 쳐다봤다.

 우기는 소연의 답을 기다렸다. 왜 그랬을지 추측도 해보았다. 긍정적이다 못해 낙관적인 추측도 함께 했다. 나와 다시 사랑하기 위해 문신을 지움으로서 강한 의지를 표현, 까지 생각했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 날 칼을 듣고 고민하던 언니의 표정은 그렇게 쿨하고 간단한 게 아니었다. 심지어 지금도 저렇게 복잡해 보이는걸. 우기는 거울이라도 있었으면 했다. 본인이 어떤 표정으로 소연을 대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본인의 감정에 대해 제대로 정의할 수 없었다. 그건 소연도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였다. 두 사람은 똑바로 선 채, 세상에서 가장 길 잃은 사람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땅에 붙어 몸을 제대로 지탱하고 있는 다리가 어색했다.

 “왜 그랬는지 물어봐도 돼?”

 “헌터 자격이 없잖아. 널 죽이지 못 했어. 그 망설였던 시간은 내가 배워온 것들을 전부 부정하는 거였어. 과연 부모님이 앞에 있었어도 망설였을까?”

 그렇게 말하며 소연이 귀 뒤를 긁적였다. 흐른 피가 소연의 손에 묻었다. 헌터 자격이 없다니. 우기의 입이 느리게 벌어졌다. 그럼 지금이라도 나를 죽여. 그 말에 소연이 우기를 쳐다봤다. 저렇게까지 스스로를 해하게 만든 게 싫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고 죽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번에야말로 죽여준다면, 몇 번이고 말해줄 자신이 있었다. 소연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소연과 함께 하는 내내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가끔씩 내가 얼마나, 얼마나 비현실적인 미래를 상상했는지.

 “우기야.”

 “응?”

 “농담이야.”

 소연이 웃었다. 풀린 눈동자 아래로 입이 호선을 그렸다.

 “헌터 자격? 그딴 거 알게 뭐야.”

 소연이 편지를 우기의 눈앞에 대고 흔들어 보였다.

 “일이 이렇게까지 된 게 거지같아서 그랬어. 이 모든 게 너무 비현실적이야. 부모님이 앞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봤어. 그랬다면? 그래, 그랬어도 망설였을 것 같더라. 내가 너무 싫었어. 정말 싫었어. 고작 이딴, 이딴 문신? 네가 뱀파이어라서 일이 이렇게 엉망이 된 건지 내가 헌터라서 엉망이 된 건지 모르겠더라고.”

 소연이 말을 한 번 멈추었다.

 “와, 진짜 모르겠더라. 둘 중 한 명만 달랐어도 일이 이 지경은 안 됐을 텐데 말이야. 진짜 딱 한 명만, 딱 한 명만. 그게 그렇게 어렵나?”

 소연이 웃었다. 안전핀이 뽑힌 수류탄처럼 한참을 웃더니 우기를 노려봤다. 그 눈에 담긴 건 살의도 배신감도 실망도 아니었다.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처럼, 버려진 사람처럼, 소연은 우기를 쳐다봤다. 그 눈빛에서 나오는 냉기에 우기는 순간적으로 소름이 돋아 몸을 떨었다. 왜 언니가 그런 표정을 짓고 있어, 그건 내가 지어야 하는 표정인데. 우기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넌 어떻게 그렇게 오랜 시간을 거짓말만 하면서 살았어?”

 그 말에 우기의 말문이 막혔다. 입을 벌리고 무슨 말인가 해보려 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애초에 저기에 대고 할 말이 우기에게는 많지 않았다.

 “넌 네가 싫지 않았어? 난 내가 싫어서 아주 미치겠던데?”

 우기가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이것에 대고는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나도 내가 싫어. 나는 나를 혐오해. 언니가 지금 나를 싫어하는 것만큼이나. 언니가 지금 언니 스스로를 싫어하는 것만큼이나. 언니는 부모님을 죽인 뱀파이어를 증오하지? 나 또한 이름도 모르는 그 자식을 증오해.”

 거기까지 말하고 우기는 미소 지었다.

 “그 자식은 언니를 슬프게 하잖아. 그런데 난 그 자식보다 나 자신을 더 증오해. 내가 그것보다 언니를 더 슬프게 했잖아.”

 우기가 한 걸음 다가서자, 소연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언니, 난 내가 싫으니까 거짓말 할 수 있었어. 그래, 그렇게 오랫동안 말이야. 이렇게 꼴도 보기 싫은 나를 언니한테 무슨 수로 소개시켜 줘.”

 바람이 차갑게 불었다. 비석 밑에 놓인 꽃다발에서 잎이 흩날렸다. 꽃을 둘러싼 종이가 자기들끼리 부딪치며 소리를 내었다.

 “거짓말은 말이지. 스스로를 싫어해야 나올 수 있어. 자신이 거짓말이나 하는 놈이라는 걸 인정해야만 입 밖으로 뱉을 수 있거든. 그리고 나는 인정할 필요가 없었지, 아주 오래 전부터. 언니도 그렇잖아.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자신한테 거짓말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잖아. 그래, 난 태어날 때부터 내가 별로였어.”

 소연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래도 딱 한 번은 말해줄 수 있었잖아.”

 소연이 두 사람 사이에 놓인 비석을 가리켰다. 소연의 부모님 이름이 곧게 새겨져있었다.

 “내가 이걸 말해준 것처럼! 너도 딱 한 번만 그러면 됐잖아!”

 소연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소연은 끊임없이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나는 너를 믿는다고 말해줬는데, 너는 거짓말쟁이에 불과했다는 말을. 쉼 없이 얘기했다. 그렇지, 언니는 나를 믿고 말해줬지. 하지만 내가 일찍 말했으면 뭐가 달라지기는 했을까? 죽음 가까이까지 가서 겨우 얻은 게 이별이었는데, 언니만은 그렇게 떠나서 나 같은 거 무시하고 살기를 바랐는데. 우기의 입 꼬리가 한 쪽만 슬쩍 올라가더니 떨어졌다. 언니, 지금 우리 어디로 가는 거야.

 “대답해 봐.”

 “뭘.”

 “나 이제 널 못 믿겠어. 날 진심으로 사랑했어? 미안하기는 해? 말해봐. 왜 여태 입 다물고 있었는지 말해봐.”

 우기는 고민했다. 이번에야말로 진실을 말할지 예전처럼 거짓말쟁이가 될지 같은 것들. 물론 그 날, 죽음 앞에서도 언니를 사랑한다고 자신 있게 말했지. 그건 단언컨대 거짓말이 아니었다. 언제든 말할 수 있었다. 미치도록 언니를 사랑했고 지금도 그렇다고. 하지만 우기의 마음 속에서 질문 한 개가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내가 사랑을 말함으로서 언니가 영원히 행복하게 살지 못한다면? 그럼 난 뭘 위해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언니가 나의 사랑한다는 말을 잊고 살아줄까.

 우기는 생각했다. 거짓말쟁이로 사는, 이딴 편지나 써서 갖다놓는, 이기적인 놈이 되고 싶지 않다고. 그렇지만 거짓말쟁이로 살지 않기 위해, 본인의 진심을 말해버리면 그럼 언니의 행복은 어떻게 되는 거지? 내 사랑을 고백하면 오히려 이기적인 놈이 되는 거 아냐? 우기가 웃었다. 좀 전의 소연이 했던 것처럼 허리를 뒤로 젖히며 웃어댔다. 와, 일이 뭐 이렇게 거지같이 됐지. 어이가 없어서 눈물이 났다.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여태 소연에게 들키지 않고 넘어간 세월만큼이나 거짓말에는 자신 있었다. 오랜 시간동안 본인을 믿고 속았던 소연이니까, 이번에도 진심 어린 표정을 짓는다면 속아 넘어갈 게 분명했다.

 분명한 결과가 우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결과로 인해 소연의 손에 죽게 된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고 우기는 생각했다.

 “언니 안 사랑해, 미안하지도 않고.”

 소연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이걸로 됐겠지. 우기는 안도감에 미소 지었다. 소연이 손으로 흐르는 눈물을 훔쳐내며 고개를 들었다.

 “그 말이 거짓말이구나.”

 그 순간 우기는 고개를 젓지 못했다.

 

 *

 

 그러니까 소연은 제대로 길 잃은 사람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도를 보여줘도 길을 찾을 수 없는 상태였다. 우기 또한 마찬가지였다. 앞으로 나아가야할 길 같은 게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우리 두 사람한테 지도가 주어진 적이 있었나? 우기는 그 물음에 대답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의 여행은 안개 속에서 바닥만 보며 걷는 꼴이었다. 우기는 안개 속에서 소연의 어깨를 끊임없이 다독이며 능숙한 거짓말을 한다. 괜찮아, 길이 아주 고르고 좋아, 거의 다 왔어, 우리는 지금

 맞는 길로 가고 있어.

 안개가 걷힌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방향감각을 잃은 두 사람에게, 선명히 보이는 풍경 같은 건 의미가 없었다. 그건 어디를 둘러봐도 눈부신 사막 한 가운데와 다를 바가 없었다. 나아가는 중이라고 생각했는데 제자리를 빙글빙글 도는 그런. 모래구덩이에 갇히지나 않으면 다행인 신세였다. 그래도 사막 한 가운데서도 우기는 해야 할 일을 알고 있었다. 희미하게나마 알고 있었다. 이전과 변함없었다.

 소연은 언젠가 이 일을 극복하고 새로운 온기를 찾을 것이다. 냉기밖에 없는 우기를 버리고 잘 나아갈 것이다. 사막의 열기보다 무서운 건 사막의 밤이다. 영원히 추운 밤이 찾아오지 않도록 우기는 우는 소연을 내버려둔 채, 걸었다. 공동묘지의 입구를 벗어나 한참을 걸었다. 조금 전의 벤치를 지나 길게 이어진 산책길을 따라 움직였다. 산책길을 따라 공원의 끝에 다다른다. 그 때까지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기로 다짐하며 우기는 걸음을 빨리했다.

 아, 우리는 어디로 가서 어디에 닿을까.

 한참을 걷던 우기는 그대로 길 위에 주저앉았다. 나무가 띄엄띄엄 들어서있는 구간에 앉아 비늘이 뒤집어지는 것을 쳐다보았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지우려 애썼다. 붉게 부어오른 소연의 귀 뒷부분 같은 거, 그만큼이나 붉게 달아오른 소연의 눈 밑 같은 거. 앞으로 나아갈 길을 안내해주기를 바라는 소연의 눈빛 같은 거. 그런 것들이 우기를 미치게 했다. 수정 테이프로 무수히 지워냈던 글자가 떠올랐다. 거짓말쟁이, 넌 거짓말쟁이.

 공동묘지를 떠나는 우기에게 소연은 또 도망치냐는 말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그래, 우기는 도망치는 게 아니었다. 도망치는 건 진실에 맞설 용기가 없는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다. 물론 소연과 함께하는 내내 우기는 무수히 많은 선택의 순간에서 도망쳤지만, 이번만큼은 도망치는 게 아니라고, 스스로 다짐하며 떠났다.

 우기는 절대로 도망치지 않았다. 도망친 건 아니지만, 그녀를 위해 떠나는 거지만, 그럼에도 누군가 우기에게 묻는다면 우기는 용기 없는 사람이기는 했다. 진실에 맞서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소연에게 맞설 용기가 없었다. 스스로에게 맞설 용기도 없었다. 평생 스스로를 속인 사람인데 한 번 더 속이는 건 일도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소연에게 말할 용기가 없었다. 다시 새로운 길을 나아가보자고, 나와 함께 사막의 낮을 지나 추운 밤을 헤쳐 나가보자고, 서로 진심으로 사랑했던 만큼 딱 한 번만 더 사랑해보자고, 거짓말쟁이인 나를 용서해달라고, 이 말도 안 되는 관계의 시작에서 미래를 만들어 보자고, 그렇게는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용기가 없었다.

 우기는 자리에서 일어나 뛰었다. 그래, 사실 그녀는 도망치는 중이었다. 또 한 번 이렇게 스스로를 속였다.

무엇으로부터? 우기는 뒤를 딱 한 번 돌아보았다. 소연을 향한 사랑을, 욕심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 딱 한 번. 그리고 뒤를 돌아봄으로서 파멸을 맞은 자들이 그러하듯 우기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런 걸 포기한 자들만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롯이 그러했고 오르페우스가 그러했듯이.

 그렇지만 뒤를 돌아본 우기는 그 자리에 멈춰선 채, 하염없이 자신이 걸어온 길만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우기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정말로. 소연이 떠난 그 순간부터 우기의 미래는 텅 비어 있었으니까. 눈앞의 모든 길이 낭떠러지였다. 우기의 입에서 사랑한다는 말이 끝도 없이 흘러나왔다. 사랑해, 너무너무 미안해. 그런 말이 끝도 없이.

 언니, 우리는 지금 어디에 닿기 위해 가는 거야?

 우기의 앞으로도, 그리고 우기의 뒤로도 산책길은 곧게 뻗어있었다. 우기는 다시 앞을 보고 걸었다. 소연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눈에 힘을 주며 걸었다. 눈물이 멈추지를 않았다. 우기야 지금 우리 어디로 가는 거야. 우린 지금 서로에게서 멀어지는 중이야. 다시는 닿지 않을 만큼 반대편 길로 가는 중이야. 우기는 몇 번이고 주저앉았다. 다시 일어서는 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렇지만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누군가 다가와 어깨를 두드려도 돌아보지 않을 것처럼, 그녀는 앞으로 나아갔다.

 

 

 

 그럼 우리는 지금 어디에 닿기 위해 가는 거야?

 

 

 

 서로에게 닿기 위해, 서로에게 닿기 위해 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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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mpire

Composite Authorsh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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