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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제: 로맨스 코미디 뱀파이어

 듀부멘탈 (@tofumental59)

 <한 겨울밤의 꿈> 

 "아니, 그러니까, 매머드 몰라?"

 "네."

 "매머드를 모른다고?"

 소연은 삼 일 전을 떠올렸다. 지금 이 대화가 왜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도 떠올렸다. 답답한 마음에 손바닥으로 이마를 때렸다. 삼 일 전, 이 바보 같은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온 게 문제였다. 그래, 그 때부터가 문제였다.

 

 *

 

 소연은 변호사다. 본인의 이름이 걸린 작은 사무실도 하나 갖고 있다. 수입은 변호사치고는 나쁜 편. 물론 먹고 살만큼은 벌고 있다. 애초에 심심풀이로 이 직업을 하게 되었기 때문에 소연에게 있어 수익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이 일을 하는 동안 문제가 일어난 적도 없었다. 수익도 평탄, 업무도 평탄했다. 평범한 사무실, 평범하게 업무를 보는 소연, 가끔씩 짜장면을 시켜 먹는 것마저도 어쩐지 평범했다.

 굳이 특이점이 있다면 소연은 인간이 아니라는 점.

 소연은 나이가 아주 많았다. 너무 오래 살아서일까.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제 특이점조차 되지 못했다. 요즘 소연 인생에 있어 특이점이 있다면 어제 시킨 짜장면에 단무지가 안 왔다는 것 정도.

 소연은 뱀파이어였다. 몇 천 년을 불로불사로 살아온 그녀의 인생에 문제가 있다면 그건 무료함이었다. 1990년도 즈음, 전 세계를 떠돌다 말고 다시 한국에 도착한 그녀는 당분간 이곳에서 눌러 살기로 작정했다. 10년 정도 있다 보니 다시 심심해졌고, 주기적으로 신분 위조를 해야 했던 그녀는 무슨 직업을 해볼까 고민했다.

 최종적으로 변호사를 골랐다. 불멸자로서 필멸자의 끔찍한 인생살이를 듣고, 법에 맞춰 조언을 하는, 적당히 재미있는 직업이 될 것 같았다.

 그럴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몇 년간 실제로 재밌었는데. 오늘 점심,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온 한 사람 때문에 그 생각은 아주 고르게 무너져 내렸다.

 

 오늘 점심으로 뭘 먹을지 고민하던 소연의 눈앞에 한 여자가 나타났다. 법률 자문을 구할 일이 있다, 상담하고 싶은 게 있다는 말을 하면서. 소연은 이혼 전문 변호사였기 때문에 당연히 이혼에 관련된 일일 거라 생각했다. 풀죽은 어깨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 묘하게 생기 없는 얼굴, 등이 그런 생각에 확신을 주었다.

 "어떤 일로 오셨어요?"

 "이게 사기죄로 경찰에, 넘길 수, 있는지가 궁금해서…"

 아, 이혼이 아니네. 소연은 꺼내던 서류를 집어넣고 여자 쪽을 향해 의자를 돌렸다.

 "네, 의뢰인 분 성함이?"

 "송우기요."

 "그래요, 우기씨."

 소연이 책상 위에 있던 노트를 펼쳐 송우기라는 이름 석 자를 크게 적어보였다. 맞은 편 빌딩에 사기 전문 변호사가 있었던 것 같은데, 소연은 그런 생각을 하며 우기를 쳐다봤다. 가까이서 자세히 보니 우기는 생각보다 훨씬 소연의 취향이었다. 고개를 숙일수록 동그랗게 치켜떠지는 눈망울, 웃음기를 거두면 의외로 차갑게 보일 것 같은 턱선, 한 번 울리면 콧물까지 흘리면서 울 것 같은 저 볼이나 태도가, 아주 취향이었다.

 보기 드문 낮고 노련한 목소리에 딱 적당한 키, 그렇지만 안절부절 못 하는 저 어깨와 손. 소연은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인기 많을 것 같은데. 풀이 죽은 사람을 앞에 두고 이런 불순한 생각을 해도 죄책감은 들지 않았다.

 

 "어떤 일로 오셨죠?"

 왜냐하면 천 살은 넘게 산 뱀파이어니까. 그런 마음을 느낄 시기는 지난 지 오래였다.

 "그게 말이죠. 제가 중고 거래로 mp3를 샀는데요."

 "mp3요?"

 소연이 되물었다. 자신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그거 제법 옛날 물건 아닌가. 그런 걸 중고 거래로 사는 사람이 있구나 싶어 소연은 새삼스레 놀랐다. 요즘은 대부분 휴대폰으로 노래를 들으니까. 그런 도구를 산다는 것 자체가 소연에게는 제법 웃긴 일이었다. 기술의 발전을 지켜봐온 사람으로서 당연히 최첨단 기술을 더 사랑하게 되는 법이므로, mp3라는 단어는 소연에게도 생경했다.

 "네, mp3요. 미키마우스 얼굴모양."

 와, 심지어 그거라고. 소연은 이제 본인의 기억이 맞는지 부정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래서요?"

 "거래자분은 엄청 친절했어요. 별 말 없이 물건도 잘 받았는데, 친구들이 구매한 가격 듣고는 다들 놀라는 거 있죠? 저는, 이게 맞는 가격이라 생각해서 샀는데, 다들 사기 당했다고 그러는 거예요. 그게, 그래서…"

 우기의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보통 이렇게 울면 폭력을 당한 사람이거나 이혼을 앞둔 양육자이거나 하는 게 대부분인데, mp3라는 단어를 말하며 우는 모습에 소연은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울지 마세요, 라고 하며 티슈를 건넸다. 우기는 눈에 맺힌 눈물을 닦더니 야무지게 코까지 풀었다. 소연은 빨갛게 변한 우기의 눈을 가만히 쳐다봤다. 오늘 일진 사납다는 생각과 동시에 역시 우니까 다른 매력이 살아나네, 같은 못돼 먹은 생각을 하면서.

 

 "일단 진정하고 몇 가지 질문에 대답해주실 수 있으세요?"

 "네에…"

 "제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그런 옛날 물건을 중고로 거래하면, 그게 작동이 잘 되는지도 의문이지만, 거래를 한다면 만 오천 원 정도? 혹은 그 이하로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적정가격이 얼마죠?"

 "친구들이 거의 새 걸로 사면 2만원이라고 했던 거 보면 변호사 님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우기가 훌쩍이며 소연을 쳐다봤다. 소연은 가장 두려운 질문을 앞에 두고 침을 한 번 삼켰다.

 

 "얼마 주고 사셨죠?"

 "10만원이요."

 "10만원이요?"

 소연은 너무 깜짝 놀란 나머지 큰 소리를 냈다. 본인도 그런 소리를 낸 게 민망했는지 짧은 사과를 덧붙였다. 우기는 놀라는 소연의 눈치를 보며 입술을 우물거렸다.

 

 "1만원은 커피 값이요. 그 분이 굳이 저 다니는 학교까지 직거래하러 와주셔서 감사해가지고."

 호구라고 불려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소연은 우기가 보지 못하게 고개를 돌려 한숨을 내쉬었다. 중고 mp3에 7만원 넘게 얹어준다니, 어느 누가 버선발로 안 뛰어오겠는가. 직거래 하러 가는 게 당연했다. 소연은 궁금증에 질문 한 개를 더 건넸다.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데. 왜 그렇게 비싼 돈 주고 사셨어요? 그, 옛날 물건을."

 "저는, 그 가격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옛날에 사서 듣던 시절에는 15만원까지도 있지 않았나요? 저는 8만 원 정도 주고 산 기억이 있지만. 그래서 중고여도 그 정도 가격인 줄 알았는데."

 진심이냐. 소연은 앞에서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는 우기를 보며 이 사태의 심각성을 느꼈다. 사태의 심각성? 아니지. 이건 우기의 심각성이었다. 대학교라는 단어를 말하는 거 보면 딱 봐도 대학생인데. 똑똑하다는 요즘 어린애들이 분명한데, 그런 바보 같은 일을 겪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건 심각한 거였다. 소연은 좀 전까지 재어보고 계산했던 우기의 매력이 반감되는 것을 느꼈다. 불쌍한 매력은 플러스가 되었지만, 어이가 없어 말이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으므로 전체적인 매력은 마이너스에 가까워지는 중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우기가 멍청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건 소연의 오랜 경험에 의한 판단이었다. 실제로 요즘 젊은 사람들 중에 멍청한 사람 몇 안 되었다. 인터넷이 너무 발달해서 대체로는 그랬다. 사무실까지 찾아온 것만 봐도 생각 있는 아이였고, 예의 바르기도 했다. 다만 답답한 아이라는 건 확실했다. 이거 의뢰가 아니라 수습인데. 소연은 겨우겨우 입을 열었다.

 "일단 우기 씨한테는 미안한 말인데, 경찰에 가도 고소 못해요."

 우기가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로 공격하지 말라고.

 "판매자가 돈을 벌려는 마음을 가진 것 자체는 맞는 것 같아요. 그런데 실제 물건을 이미 받았고, 거래 사이에 더한 금품 요구도 없었던 데다가 이게 엄청난 거액도 아니고. 무엇보다 서로 거래할 때, 그 가격에 사는 게 맞다고 합의를 한 상태로 거래가 완료된 거면 제품에 고의적인 하자가 있지 않는 이상 고소할 수 없어요. 우기 씨도 그 가격이 적당하다 생각해서 샀고. 안 봐도 비디오인데. 우기 씨 거래 당시 문자나 카톡에도 그런 말들 해놨죠? 가격 좋다는 말."

 우기가 어떻게 알았냐며 벌어진 입을 양손으로 틀어막았다. 아는 게 아니라 보이는 거였지만.

 

 "그래서 죄송하지만 고소는 어렵습니다."

 "어떻게든 안 되나요?"

 "어떻게도 안 돼요."

 이런 때에는 오히려 강경하게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뢰 가능한 위치인 변호사가 NO라고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긍하기 마련이다. 대부분의 사람들 말이다. 진상의 경우에는 해달라며 강요하기도 하는데, 우기는 진상이 아니며 강요할 만큼 폐를 끼치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다만 사고가 이상한 방식으로 튀어 도움 안 되는 해결 방법을 제시하기는 했다.

 "그 사람한테 가서 돈 받아올까요?"

 "네?"

 "제가 가격 몰랐다고 하면 조금은 돌려주지 않을까요."

 소연의 입에서 허, 하는 소리가 나왔다. 저도 모르게 뱉은 소리였다. 우기의 표정은 농담이 아니었다. 어이가 없었다. 그럼에도 소연은 침착하게 답하려 애썼다.

 "아니요, 절대. 돌려주지 않을 거예요. 일단 불러도 나올 리 없고. 말했지만 이 문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생각하세요, 교훈 삼아 넘어가는 걸로."

 "그렇지만, 저는, 그러니까."

 소연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건 하소연 타임이었다. 의뢰인들을 만날 때마다 이런 식이었다. 진행 과정이 이 쯤 되면 살풀이인지 한풀이인지를 하며 소연 앞에서 인간극장 뺨치는 길이의 사연을 늘어놓는 게 전통인 것 같았다. 소연은 그들의 억울함을 들으며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피부로 직접 느꼈다. 요즘 사람들 이렇게 사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추억의 mp3가 갖고 싶어서. 그거 진짜 추억이었거든요. 변호사님도 써본 적 있으세요? 저도 스마트폰이나 에어팟 같은 거 쓰는 20대지만, 그렇지만 가끔 추억 팔이라는 거 하고 싶잖아요. 그 시절에 저는 mp3로 친구들이랑 우정도 쌓고, 짝사랑 상대랑 노래도 들어보고 그랬거든요. 그래요, 그런 거. 그러니까 저한테는 10만원 덥석 줄만큼의 황금 같은 추억이었는데."

 우기가 다시 눈물을 터트렸다. 만두같이 동그란 얼굴에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배고프다. 소연은 그런 생각을 하며 우기에게 티슈와 물 한잔을 건넸다. 우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소연은 공감과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 사람도 참 나빴네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커피 값까지 받아가고. 그렇죠? 우기 씨도 참. 울지 마세요. 교훈 얻었다고 생각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그런 오래된 추억의 물건을, 우기 씨 아주, 금값을 주고 사셨네."

 "저에게는 황금 같은 추억이니까요!"

 거의 짜내듯이 터트리는 눈물을 보며 소연은 재킷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손을 뻗어 우기의 턱까지 흐른 눈물을 닦아주었다. 물론 속으로는 '와 황금 mp3 오졌다, 내로남불 오졌다.' 같은 생각을 했지만. 적당히 이런저런 말들로 달래주니 진정이 되었는지 우기가 고개를 들었다. 자신의 눈 밑을 문질러 닦던 손수건을 꼭 쥐고는 소연을 빤히 쳐다봤다.

 "죄송해요. 갑자기 떠들어대서. 어린애처럼 울기나 하고"

 소연은 그 말이 웃겨 가볍게 웃었다. 소연 입장에서 보자면 어린애가 맞으니까.

 "괜찮아요. 당연히 그럴 수 있죠. 제가 도움 드릴 수 있는 게 없는데, 마음이 얼마나 서운하시겠어요."

 이제 집에 잘 돌려보내야겠다 싶어 소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우기에게로 다가갔다. 우기를 일으키려 하자 우기가 소연을 올려다봤다. 손수건을 달라는 의미로 손을 내밀었는데 우기가 소연의 손을 꼭 붙잡았다. 따끈따끈한 온기가 소연에게로 옮겨져 왔다. 당황한 얼굴로 쳐다보자, 우기는 어린 학생 특유의 '미안하기는 한데 어떻게 대처해야 좋은지 몰라 곤란해 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시간 뺏어서 죄송해요. 의뢰비인 셈 치고, 손수건이라도 빨아서 돌려드릴게요. 너무 너무 … 더러워져서……."

 어쩔 수 없었다. 이건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소연의 마음속에 9개의 구획으로 나뉜 스트라이크존이 있다면 정확히 정중앙에 변화구 하나 없는 직구가 꽂혀 들어왔다. 미트볼에 공이 꽂히는 소리가 호쾌하게 났다. 소연의 머릿속 자아들이 '아웃! 시속 150km! 아웃!'을 외쳐댔다. 애가 불쌍해서 그러는 거야, 소연은 스스로의 마음에 거짓말 한 번 해준 뒤 미소 지었다.

 "괜찮으니까 여기 사무실에서 점심이라도 먹고 갈래요? 제가 사줄게요. 그 사람한테 뜯긴 커피 값 받는다 생각하고."

 

 *

 

 볶음밥만 시켜주려고 했는데. 소연은 그렇게 생각하며 젓가락으로 깐풍 새우를 집어 들었다. 배달메뉴를 보던 우기가 깐풍 새우 맛있게 생겼다, 한 마디 하며 코를 훌쩍였을 뿐이었다. 소연은 나이 더 많은 내가 인심 쓴다는 마음이 되어 깐풍 새우까지 주문했다. 소연은 우기의 볶음밥 위에 단무지를 올려주었다. 자기도 단무지를 좋아한다며 웃는 우기가 귀여웠다. 맛있다며 볼을 우물거리더니, 고맙다는 말로 예의바르게 인사했다. 그 모습은 전형적인 대학생 같고 참 착해서 좀 전의 바보 같은 사연을 잊게 했다.

 "우기 씨, 기분 좀 괜찮아졌어요?"

 "네에."

 하도 오래 살아서 그런가. 어쩐지 손자손녀 밥 다섯 끼 먹이는 할머니가 된 기분이었다. 그래 잘 먹는 모습이 보기 좋네, 같은 마음을 먹게 하는.

 "그런데 우기 씨, 저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되요?"

 "네, 뭔데요?"

 "그 mp3 갖고 싶어진 결정적인 이유가 뭐예요."

 "추억의 mp3로 추억의 노래를 듣고 싶어져서요. 갑자기 그런 기분이 되서."

 우기가 웃었다. 소연이 티슈를 건네주자 입 주변을 닦았다. 거기 말고 다른 곳에 튀었어요, 라고 알려주자 티슈로 얼굴 곳곳을 닦았다.

 "변호사님도 그런 적 있으세요? 옛날로 돌아가고 싶은 기분이요. 저야 뭐, 아직 대학생이라 그런지 고작 몇 년 전인 중고등학생 시절이 옛날이지만.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중 어떤 부분만 쏙 골라서 돌아가고 싶은 거요. 선생님한테 혼났던 순간은 안 돌아가고 싶으니까."

 악동처럼 웃는 얼굴에 대고 소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기분 잘 안다고 말했다. 사실이었다. 소연은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 정말 무수하게 많았으니까. 년도조차 잘 기억 안 나는 시절들. 다시 체험해보고 싶은 시간이 분명 있었다. 옛날 물건이라, 그런 걸 얻으려면 소연은 박물관에 가야할 것이다.

 "아무튼 그런 기분이 들어서. 이 mp3로 예전에 많이 듣던 노래가 있거든요. 수험생 시절에도 꾸준히 들었어요. 그 노래를 컴퓨터로 듣다가 문득 다시 그 mp3로 듣고 싶어진 거 있죠. 그래서 찾아보고 구매했죠."

 "그랬구나. 노래는 들었어요?"

 "아직요."

 소연은 다 먹은 그릇을 정리하기 위해 일어섰다. 우기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이런 건 본인이 할테니 앉아있으라고 했다. 소연이 엉거주춤하게 있자, 우기가 빠른 속도로 그릇을 모았다. 쓰레기들도 한데 모아 비닐에 넣었다. 빠릿빠릿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한 시간 전과는 참 다른 사람 같았다. 물론 완벽하게 상을 치우는 얼굴에 짜장 소스가 묻어 있다는 점 때문에 다시 같은 사람으로 보였지만. 소연이 휴지를 건네자, 우기가 볼을 소연 쪽으로 내밀었다. 처음 보는 어른한테 이렇게 귀여움을 어필한다고? 소연은 휴지로 볼을 문질러 닦아주었다. 어필 아주 좋네.

 

 "그, 변호사님."

 "네?"

 바깥에 그릇을 내놓고 돌아온 우기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단어들을 중얼거렸다. 뭉개진 발음이었다.

 "말해보세요. 전 의뢰인들 말하는 거 듣는 게 직업인걸요."

 "노래 들어보실래요?"

 "네?"

 "아니, 그게 아니고, 제 추억의 노래."

 우기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펴 보인 손바닥 안는 작은 미키 마우스가 있었다. 아, 이게 그 문제의 황금이군. 소연은 mp3 한 번 쳐다본 뒤, 시선을 옮겨 우기의 얼굴을 쳐다봤다.

 "진짜 노래 좋거든요. 밥까지 얻어먹으니까 너무 죄송해서 보답으로… 아니, 그런데 이게 보답이 되지는 않겠네요. 그렇지만 노래 정말 좋아요!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실 것 같아서… 사람들의 노래 취향이 다 같지는 않지만. 하지만 저 이 노래에 제법 자신 있거든요. 제 노래 취향에도 자신 있고? 하하…"

 우기가 자신 없는지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인 채로도 중언부언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노래 안 들어주면 눈물을 한 번 더 흘릴 것 같았다. 천성이 울보인 건 아닌 것 같은데. 하긴 소연 본인이 생각해도 그런 어이없는 일을 당하면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화가 나거나 눈물이 나는 게 보편적인 반응이니까.

 "좋아요. 저도 좋은 노래 들으면 좋죠. 우기 씨, 유선 이어폰 있어요?"

 "헉, 네!"

 우기가 가져온 백팩에서 이어폰 줄을 끄집어냈다. 엉킨 부분을 풀더니 소연에게 한 쪽을 건넸다.

 "절 믿으세요. 이 노래 진짜 좋거든요."

 나머지 한 쪽을 자신에 귀에 꽂더니 mp3를 켜 노래를 이리저리 넘겼다. 재생을 누르자 그 노래가 흘러나왔다. 오로지 기타 소리와 가수의 목소리에만 의존한 노래였다. 그런 만큼 심플했지만 그런 만큼 노래를 잘하기도 했다. 통기타 소리를 제외하고는 정말 그 어떠한 백그라운드 사운드도 없었다. 가수도 허밍을 하거나 별다른 기교를 부리거나 하지 않았다. 가사가 아름다웠다. 멜로디도 좋았으며 노래를 끝내주게 잘했다. 눈을 감고 노래를 감상하던 소연은 정말 좋은 노래를 들었단 생각에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행복해하고 있을 줄 알았던 우기는 의외로 눈물을 뚝뚝 떨구고 있었다.

 

 "왜, 왜 그러세요. 우기씨, 괜찮아요?"

 "괜찮아요."

 "왜 또 울어요."

 소연은 또라는 글자에 악센트를 주었다.

 "추억의 mp3로 노래를, 심지어 이 노래를 듣는 게 너무 좋아서요."

 "아, 좋아서 우는 거예요?"

 "그런데 이걸로 듣고 있으니까 제 10만원이 떠올라요. 내 10만원, 이제 없어, 너무 슬퍼."

 귀엽기는 한데 조금 짜증나는 것 같기도. 예쁘지만 자주 우는 조카를 돌보는 게 이런 기분일지도 모르겠다. 우는 모습이 귀엽고 사연이 불쌍한 건 맞지만, 우기는 지금 소연과 썸 타자고 데이트하러 온 사람도 아니었고 소연의 친구도 아니었다. 엄연히 공적인 사유로 만난 관계였다. 의뢰인과 변호사였다. 물론 의뢰가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역시 가서 말하는 게 좋을까요?"

 "어딜 가요? 아, 경찰이요?"

 "아니요, 그 판매자한테요."

 "네?"

 소연의 언성이 또 한 번 높아졌다. 소연이 보기에 우기는 감정에 쉽게 지는 사람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사람을 굉장히 쉽게 믿는 타입이거나.

 "가서 한 번 말해봐야겠어요. 설득하면, 뭐, 그래도 들어는 주시지 않을까 하고."

 "어어, 애초에 2만원에 팔 수 있는 걸 9만원에 팔고 야무지게 커피 값도 만 원 받아간 사람이 설득을 당할까요?"

 우기는 대답이 없었다. 그래, 당연히 설득 안 당할 테니까. 소연은 이제 답답해서 가슴을 치기 일보직전이었다. 본능적으로 자신보다 한참 어린 이 아이가 걱정되었다. 이러다 연쇄사기라도 당하면 큰일이었다.

 "그, 판매자 분 몇 살 정도였어요?"

 "30대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 분이요!"

 심지어 남자. 소연은 가망 없는 게임을 시작하려는 우기를 쳐다봤다. 목검을 든 레벨 1의 용사가 거대한 괴물에게 맞서려는 꼴이었다. 레벨, 그러니까 경험도 부족했고 필요한 장비도 전혀 없었다. 그 용사가 가진 거라고는 오로지 의지. 의지력뿐이었다. 의지력은 때로 강한 힘이 되어주기도 하지만 그건 지금 상황과 같은 현실에서는 턱도 없는 일이었다.

 "일단 좀 전에도 말했듯이 목적을 가지고 판 사람이니까 우기 씨가 하는 말을 들어줄 리 없어요. 저는 확신해요. 정말 제 변호사 인생이고 생애고 뭐고 다 걸고 확신합니다."

 "그렇지만 인상이 선해보였는데. 봐요."

 우기가 자신의 휴대폰 사진첩을 보여주었다. 한 남자의 얼굴이 찍힌 사진이 있었다. 이런 거 몰래 찍으면 안 된다고 소연이 조곤조곤한 어조로 말하자, 제품 사진을 찍기 전 실수로 셀카 모드가 되어 찍혔다고 했다. 자세히 보니 남자의 얼굴이 찍힌 사진 구석에 우기의 이마가 보였다. 실수로 찍었다는 말은 사실인 듯 했다.

 "음. 저기 우기 씨."

 "네."

 굳이 말하자면 그냥 길 가다 볼 수 있는 평범한 인상의 30대 남성이었다. 몹시 착해보이지도 몹시 나빠 보이지도 않는, 좋은 말로 하자면 평범하고 속된 말로 하자면 속내를 파악할 수 없는, 그런 인상.

 "그 사진 저 한 번만 더 보여주실래요?"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남자의 인상이 선한지 아닌지 따위가 아니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인상이란 말이지. 소연은 사진을 한 번 쳐다본 뒤, 책상 서랍을 열어 파일철을 꺼냈다. 기억이 틀리기를 바랐다. 모아놓은 서류들을 뒤적이던 소연이 한 장의 수배지를 찾아냈다. 보이스피싱과 은행사기가 급증하던 시절, 경찰서에서 한 장 받아가라고 해서 받아왔던 종이. 거기에는 10명 정도 되는 사기범들의 얼굴이 있었다. 실제로도 몇 번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소연은 거기서 한 남자를 찾아냈다.

 "우기 씨, 이것 좀 봐요."

 "헉! 저랑 거래했던 그 사람이네요!"

 "밑에 글자 보이죠? 초범 아니고 몇 번 씩이나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에요. 게다가 잡혔을 때 공범도 많았고. 이 수배서에 있는 사람들은 사기범들 중에서도 위험해요. 다른 범죄를 병행해서 하는 사람들이고, 경찰들도 찾으려고 난리니까. 작은 사기로 끝난 걸 오히려 다행으로 아세요. 찾아가지 마시고요. 전화번호도 지우세요. 아시겠죠?"

 "네, 네, 꼭 그럴게요."

 마침내 찾아온 안도감에 소연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백팩을 챙겨드는 우기의 손에 캔디와 과자를 한가득 쥐어준 뒤, 손에 캔 음료도 한 개 들려주었다. 조심해서 가고 꼭 시킨 대로 하라는 말에 우기는 걱정하지 말라며 웃었다. 다행히 별 일 없겠구나 싶었다. 돈 받은 건 없지만 한 건 해결한 기분이었다. 감사하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우기는 사무실을 떠났다.

 음, 그런대로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소연은 휘파람을 불며 곧바로 블라인드를 쳤다. 오후 3시의 햇빛은 조금 위협적이었다. 알레르기가 올라오듯 빨개진 팔을 긁으며 에어컨을 켰다. 소연은 빨리 겨울이 오기를 바라며 11월이라 적힌 달력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

 

 소연은 잠에서 깨어났다. 주말이었고 일은 없었다. 잠에서 깰 시간이 아니었다. 무엇 때문에 깼는지 파악하려 애쓰던 소연은 꿈 때문에 깬 거라는 생각을 제일 먼저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꿈자리가 사나웠다. 악몽까지는 아니었지만. 소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꺼냈다. 물을 충분히 마신 뒤, 냉장고에 넣어놓았던 소고기를 꺼냈다. 안심 두 덩이를 식탁 위에 올려놓은 뒤,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꿈속에서 소연은 걷고 있었다. 익숙한 거리였다. 포격과 수류탄으로 인해 건물이 죄다 무너진 거리. 그나마 멀쩡한 건물들도 곧 무너질 것처럼 벽돌이 떨어졌고,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알 수 없는 전쟁 중의 거리였다. 독일이었나, 어쩌면 프랑스, 어쩌면 이탈리아. 소연은 건물이 지어진 양식과 주변 풍경을 둘러봤다. 독일처럼 보였다. 어쩌면 아니고. 프랑슨가. 자신이 없었다. 세계 전체에서 전쟁이 벌어지던 시절, 소연은 온갖 곳을 돌아다녔다. 어디서 뭘 하고 다녔는지 기억하려면 시간을 한참이나 써야했다. 그리고 그 무렵 소연은 전쟁이 일어나는 곳을 일부러 찾아다녔으므로 자신이 어디 있는지조차 모른 채 걸어 다녔다.

 낡은 코트를 입고, 다 찢어진 베레모를 쓴 채 거리를 걸었다. 가끔 소연을 발견한 병사들이 총을 겨누었다. 저격 총으로 결정타를 날리기도 했다. 소연은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졌고, 병사들이 떠나면 자리에서 일어나 피를 닦으며 걸어갔다. 그냥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개념도 장소가 움직이는 개념도 모른 채 살아가던 시절이 있었다. 너무나도 심심했고, 너무나도 이 인생을 끝내고 싶어서 그랬다. 일부러 그런 전쟁통을 찾아다니고는 했다. 어떤 날에는 잠들었다 일어나보니 건물의 잔해 밑에 파묻혀있던 적도 있었다. 물건을 주우러 나온 몇몇 피난민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고는 했다. 흙먼지가 가득한 머리칼을 털며 소연은 걸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 때는 시간과 장소 말고도 잊고 싶은 게 있었다. 그리고 꿈속에서 그걸 봤다.

 

 그걸 떠올리려는 순간, 소연은 휴대폰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화면에 부재중 전화 알림이 있었다. 이것 때문에 깼구나. 벨소리를 알람으로 착각하고 깬 게 분명했다. 전화번호에는 낯선 번호가 떠있었다. 010으로 시작하는 걸 보니 스팸은 아니었다. 연락이 다양한 곳에서 올 수 있는 직업을 하고 있다 보니 낯선 번호에 거리낌은 없었다. 소연은 주방으로 걸어 나가며 목을 가다듬었다. 걸려왔던 번호로 전화를 걸자, 몇 번의 수신음이 들렸다. 이내 여보세요 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어디에서 전화 주셨을까요?"

 "전소연 변호사님 맞으세요?"

 "네, 제가 전소연 본인입니다."

 "아, 변호사님! 저 우기예요! 3일 전에 왔다 갔던."

 "아, 우기 씨!"

 단숨에 그 얼굴이 떠올랐다. 수화기 너머에서 환하게 미소 짓고 있을 그 인상이. 이렇게 특징적인 목소리를 잊은 자신이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다시 들어보니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우기의 목소리가 실제로 듣는 것보다 더 부드럽게 들리기는 했다.

 "어쩐 일이세요?"

 "혹시 오늘 출근하시면 사무실에서 물건 좀 찾아봐주실 수 있으세요? 저 교통카드를 잃어버린 것 같아요. 항상 바지 뒷주머니에 넣어서 잃어버릴 수가 없는데,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게 변호사님 사무실이어서요. 시간 되시면 찾아봐주실 수 있는지 해서요. 금액이 좀 많이 들어서, 하하."

 우기가 머쓱하게 웃었다.

 "오늘 출근일은 아니지만 급하면 찾아봐줄 수 있어요."

 "아니요, 그렇게 급한 건 아니에요! 저 오늘은 받으러 갈 시간도 안 되고요."

 "주말이니까 아르바이트 하나요?"

 "아니요, 오늘은 안 하는데. 약속, 약속이 있어서!"

 소연은 흐음 하는 소리를 낸 다음, 프라이팬과 올리브유를 꺼냈다.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었으므로 그 다음 소연이 한 질문 또한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어떠한 의도도 없었으며 그냥 습관적으로, 혹은 일상적으로 물어보는 질문이었다.

 "무슨 약속인데요?"

 그 질문에 수화기 너머가 침묵으로 가득 찼다. 질문 자체가 불편해서 오는 침묵이 아니었다. 수화기 너머로 우기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는데, '어, 음, 그게' 같은 말뿐이었다. 뭔가 숨기는 사람의 반응이었다. 뭔가를 숨기려 하는데, 제대로 숨기지 못한 정직한 사람의 반응. 그렇지만 이상했다. 고작 하루 만난 우기가 소연에게 숨길 게 뭐가 있겠는가. 보통은 없는 게 정상이다.

 무슨 약속인지 소연에게 숨기는 이유가 뭘까. 소연은 처음에 우기가 불법적인 일이라도 하나 싶었다. 그렇지만 그럴 배짱이 있어 보이는 사람은 아니었고, 나쁜 사람도 아닌 것 같았는데. 소연은 순간 우기가 불법적인 일자리에 휘말린 건 아닌가 싶어 걱정되었다.

 "이거 그냥 제 직업병이라 물어보는 건데, 노파심 같은 건데, 우기 씨 불법적인 아르바이트 하는 건 아니죠? 뭐라고 하려는 게 아니라 진짜 그냥 직업적으로 걱정이 되서. 어른이라 그런가 걱정이 막 되서."

 "네?"

 그 말을 하더니 우기가 큰 소리로 웃었다. 수화기에 댄 귀가 따가울 정도였다.

 "아니요! 저 그런 거 안 해요, 하하. 저 그냥 돈 다시 돌려받으… 러…… 아, 망했다."

 웃음소리가 그치더니 수화기 너머가 다시 침묵으로 가득 찼다. 소연은 우기의 말에 놀라 프라이팬에 기름을 냅다 들이부었다. 이거 스테이크가 아니고 소고기 튀김 되겠네. 소연은 정신 차리고 개수대에 기름을 버렸다. 그 동안 변명거리를 생각하려 애쓰는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소연은 한숨 한 번 내쉬고, 키친타월로 프라이팬의 가장자리를 닦았다.

 "우기 씨. 제가 그 때 분명 위험하다고 말씀 드렸던 것 같은데요."

 "아니, 그래서 저도 만날 생각까지는 없었고. 카톡으로 여쭤봤는데, 죄송하다고 반성하신다고 돈 돌려드린다고 하셔서."

 "그런데 왜 만나요. 계좌이체 할 줄 모른대요, 그 사람이?"

 "사죄의 의미로 다른 것도 준다고, 꼭 얼굴 보면서 사과하고 싶대서."

 그걸 믿냐. 그 말이 소연의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최대한의 인내심과 예의로 참아냈다.

 "어디서 만나기로 했어요."

 "진짜 걱정 마세요! 00구에 있는 ㅁㅁ공장 아세요? 거기 큰 공장단지. 거기서 만나기로 했어요. 시간도 저녁 6시고 공장에 일하는 사람들 많잖아요. 안심하세요."

 "아니, 저기."

 "교통카드 찾아보시고 연락 주세요. 저는 지하철 타야 해서 그럼 이만!"

 뚝 소리가 나더니 전화가 끊겼다. 소연은 어이가 없어 한동안 휴대폰 화면을 쳐다봤다. 010으로 뜨는 번호를 빤히 쳐다본 뒤, 개수대에 프라이팬을 그대로 처박았다. 식탁 위에 올라가있는 고기를 집어 들었다. 팩의 비닐을 뜯고, 날 것의 고기를 그대로 씹었다. 질겨서 잘 뜯어지지 않았다. 소연이 입을 벌렸다. 아래턱 관절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송곳니가 길어지더니 금방 날카로워졌다. 고기의 힘줄을 송곳니로 물어뜯었다. 소연은 있는 대로 살점을 뜯어먹은 뒤, 잠시 숨을 골랐다.

 딱 봐도 안심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저녁 6시 정도면, 그리고 00구의 ㅁㅁ공장 정도면 사람이 그나마 제법 다니는 곳이라지만, 그런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도 된다면, 그 남자가 우기에게 사기를 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9만원 어치 사기를 친 연쇄범이 갑자기 개과천선한다고?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지. 소연은 답답했다. 물론 믿는 게 죄는 아니었다. 믿을 수도 있었다. 고등학생, 대학생, 한참 사람을 믿으려고 애써볼 나이였다. 본인이 사람을 잘 가려내고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해도 실패하는 게 사람인데, 나이가 어리면 그 비율이 더 클 수밖에 없었다. 어딘가에 좋은 사람이 있을 거고, 본인에게는 특별한 일이 있을 거라는 착각. 그건 참 나빴다. 우기의 마음도 그런 순수하고 선한 마음에서 비롯됐을 거라는 게 소연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어쩔래.

 소연은 고기를 남김없이 집어삼킨 뒤, 입을 우물거렸다. 송곳니가 원래대로 돌아온 것을 만져서 확인한 뒤, 개수대에서 손을 씻었다. 따라갈까. 따라가서 뭐 어쩔 건데. 어쩌면 괜한 오지랖을 피우는 것일 수도 있다. 우기의 말이 어쩌면 맞을 수도 있다. 그래, 저녁 6시, 무슨 못된 짓을 하려고 부른 건 아닐 수도 있지. 그리고 이건 엄연히 말하자면 남일에 불과했다. 우기는 고작 하루 본 사람이었고, 심지어 소연과는 이제 의뢰인 사이도 아니었다. 의뢰를 받은 적이 없으니 사실상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답답해서 도와주고 싶은 마음 정도는 있지만 그 외에는 도와줄 이유가 전혀 없었다.

 과한 선행 같은 건 오래 전에 그만뒀다. 소연은 언제부턴가 인간과는 다른 능력으로 남을 도우려 하는 일이 무의미하다는 걸 깨달았다. 본인도 인간처럼 사는 게 맞았고, 인과율에 과도하게 간섭하는 것은 좋지 않았다. 누구나 할 수 있는 힘들지 않은 선행 정도. 그거면 되었다. 나는 인간보다 우월하니까, 라는 마음으로 도우다보면 끝이 없었다. 결국에는 이용당하거나 허망해지거나 둘 중 하나였다. 도우려고 해서 잘 되는 꼴을 본 적이 없었다. 그게 능력을 써서 돕는 거든 인간된 도리로 돕는 거든 간에.

 

 나이 먹고 오지랖만 생기네. 소연은 대신 교통 카드만 찾아주기로 했다. 저녁 무렵이 되서야 몸을 일으켰다. 펑퍼짐한 후드에 청바지 하나 입고 거리를 나섰다. 주위에 트렌치코트나 스웨터를 입은 사람들이 간혹 지나다녔다. 날씨가 점점 추워지는 게 보였다. 반면 맨발에 삼선슬리퍼를 신고 나온 소연은 별다른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문에 열쇠를 넣고 돌렸다. 찰칵 소리가 나고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카드라면 우기가 그 날 앉았던 자리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의자와 바닥을 제일 먼저 뒤졌다. 소연은 의자 팔걸이와 쿠션 틈새에 꽂혀있는 카드를 발견했다.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진 흰색 카드. 카드에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글씨였는데 영어는 아니었다. 이게 어느 나라 말이지. 소연은 자신의 기억을 더듬었다. 몇 번 발음하다 보니 스페인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no te rindas nunca

 포기하지 말라는 뜻. 교통 카드에도 이런 말이나 써 붙이고 다니니까 사기범을 설득할 생각이 들지. 대체로 인간들은 이십대 중후반을 넘기면 포기가 빨라지는 경향이 있었다. 소연 또한 그게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생각했다. 포기할 것들이 늘어가는 것도 정상이고, 필요할 때 포기할 줄 아는 것도 정상이다. 모든 걸 끌어안고 살 수는 없다. 먹고 싶은 만큼 먹기에는 위장에 한계가 있는 것처럼.

 포기하지 말라는 말. 글쎄, 그게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지. 이번만큼은 포기하자, 라는 말도 멋진 말이니까. 물러날 줄을 아는 거다. 오지랖 안 피우고. 소연은 교통카드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사나웠던 꿈자리가 떠올랐다.

 

 *

 

 다시 꿈 속 기억을 되짚어갔다. 멱살 잡히듯 끌려온 소연은 그것 앞에 섰다. 어떠한 시간과 어떠한 장소에서도 잊고 싶었던 것. 꿈속에서 소연은 그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기근과 가뭄으로 인해 깡마른 여자아이. 언제쯤인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인류 역사에는 그런 시기가 너무 많았다. 좁은 통로 사이로 잘 다녔고 지리와 방향 감각에 능했다. 굶은 사람치고는 순발력도 좋았다. 우연히 만난 그 친구에게 소연은 음식을 아주 많이 주었다. 본인은 먹지 않아도 몇 개월은 살 수 있었으니까. 그 아이가 마음에 들었다. 소연은 그 무렵, 아이가 사는 마을에 신물이 난 상태였다. 점점 흉포해지는 사람들이 꼴보기 싫었다. 평화로운 곳에서 안락하게 살기 위해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좀 부유하게 살아볼 요량이었다. 아무도 찾지 않는 무너진 건물을 뒤져 보석들도 몇 개 챙긴 상태였다. 보석을 챙기고 나오는 길에 만난 아이였다.

 보석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아서 음식을 줬다. 그 여자아이는 초코바를 받더니 소연에게 친구나 하자고 했다. 이 난리 속에서 친구를 하자고? 그 정도로 철없을 나이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얼굴은 진심을 말하고 있었다. 친구 하면 뭐가 좋냐고 소연이 퉁명스레 묻자, 여자아이가 환하게 웃었다. 얼마 없는 볼살을 끌어올리며. 그냥 본인 기분이 좋다고. 아이는 그렇게 말했다.

 사람은 기분만으로 살아갈 수 없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소연은 그 지역을 떠나지 않고, 아이와 어울려 다녔다. 남들 없는 곳에서 음식을 먹이고 말동무가 되었다. 사랑을 모르지는 않지만 사랑한 것 또한 아니었다.

 사랑하지 않아도 특별한 관계는 언제나 존재할 수 있었다. 그 아이가 그랬다. 사랑이 있어도 상관없었지만, 사랑이 없어도 이미 충분한 관계였다. 점점 그랬다. 대기근이 금방 끝날 거라 믿는 아이와 소연은 놀랍게도 1년이나 함께 놀았다. 소연도 그 무렵이면 대기근이 금방 끝날 줄 알았다. 가뭄은 계속 되었고 비는 내리지 않았다. 민심이 들썩였고 소연은 그 기류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다른 곳에 가서 살자는 소연의 제안에 아이는 가족을 두고 갈 수 없다고 대답했다. 소연은 그랬다. 몇 천 년을 넘게 살아온 불멸자임에도, 욕심을 버릴 수 없었다. 그런 점이 인간다웠다.

 내가 네 가족이잖아. 두고 와.

 아이는 소연의 이기적인 말에도 화 내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심지어 앞에 말은 맞다고 했다. 뒷말은 생각해보겠다며 아이는 소연에게 빵 한 개만 더 달라고 했다. 가족에게 딱 하나만 가져다주고 싶다면서. 어디서 받았는지 말하지 않겠다고. 이번 한 번이면 된다고. 소연은 흔쾌히 건네주었다. 소연은 음식도 많았고 건강했고 가진 돈도 많았다. 소연은 그 아이에 비하면 가진 게 많았다. 아주 많았지만, 소연에게 있어 가지지 못한 것은 가지고 싶은 것이었다.

 

 다음 날, 아이가 나타나지 않았다. 소연은 아이를 찾으러 갔고 마을 광장에 묶여있는 걸 발견했다. 교수형은 아니었다. 칼로 허리를 베인 상태였다. 목이 매달려 죽는 것보다 더 끔찍했다. 그건 죄에 대한 본보기였다. 나중에야 소연은 그 죄목이 '음식 절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소연이 준 음식 때문에 오해를 사 처벌을 받았다. 소연은 아이를 끌어내렸다. 아이는 여전히 살아있었다. 출혈이 심했지만 숨은 쉬고 있었다. 소연은 아이를 살리려고 했다. 정말이다. 그것만큼 실재하는 사실도 없었다. 살리기 위해 애썼지만 살릴 수는 없었다.

 소연에게 있어 가지지 못한 것은 영원히 가질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그 모든 것을 잊고 싶었다. 잊고 싶다기보다는 죽고 싶던 시절이었다. 소연은 대포를 정통으로 맞아도 죽지 않는 몸이었다. 굶어서라도 죽어보려 했지만, 먹지 않아도 족히 5년은 살 수 있는데다가 인간들은 굶고 있는 소연을 발견하면 살리려 애썼다. 소연은 눈물이 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 때 죽어가는 그 애를 살렸어야지.

 아무도 그 아이를 살려주지 않았는데, 소연은 죽을 수조차 없었다. 몇 십 년이 흘렀다. 기근이 끝나 번영한 마을에 다시 방문한 소연은 광장을 올려다봤다.

 두고 와.

 소연은 죽음을 기도했던 시절을 떠올렸다. 광장 가운데 선 채, 손을 모아 짧은 기도를 올렸다. 그 모든 시절을 거기에 묻어버리기로 했다.

 그 뒤로 소연은 가지고 싶은 것은 가지지 않기로 했다. 가질 수 없을 것 같으면 곧바로 포기했다. 관계도 만들지 않고 괜한 짓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이나 선행이 어떤 식으로 뻗어나갈지 알 수 없으니까.

 

 *

 

 그렇지만 또 후회하게 되면 어떡하지.

 소연은 고민 끝에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이번에도 자신이 늦었을까 봐 조금 두려워하며.

 

 *

 

 저녁 5시 50분이었다. 이미 남자를 만났을 수도 있었다. 받지 않는 사실에 걱정이 될 즈음 우기가 전화를 받았다. 인사도 생략하고 어디냐 묻자, 우기는 남자를 기다리는 중이라고 했다. 아직 오지 않았다고. 생각보다 늦는다고. 소연은 그 말에 불안감을 느끼며 사무실 문을 잠그고 택시를 잡기 위해 대로변 쪽으로 걸었다.

 금방 도착할 테니 최대한 기다리라는 말에 우기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소연은 적당한 변명을 떠올렸다. 혹시 그 남자와 얘기하는 동안 법률적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르니 본인이 도와주겠다고. 아는 언니라 소개하면 된다고, 도와주러 가는 거라고. 우기는 의심하지 않았다. 자꾸 도움만 받아서 미안하다며 빨리 오라는 말로 답했다.

 

 소연은 택시를 잡아타며 전화를 끊었다. 퇴근 시간이라 그런지 차가 조금씩 막혔다. 10분은 무리였다. 20분 안에라도 도착만 한다면 다행이었다. 예전에는 건물 위를 뛰어다니거나 날아다닐 수 있었는데, 요즘 세상에 그랬다가는 기사에 뜨거나 잡혀가기 십상이라 그럴 수 없었다. 택시는 최대한의 속도로 달려주었지만 소연은 초조한 마음에 손가락으로 무릎을 두드렸다. 인간들은 대체 무슨 인내심으로 이 따위 느려터진 수단을 타고 다니는 거야. 소연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를 즈음, 택시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시간 6시 30분이었다.

 

 *

 

 해가 지는 중이었다. 주변이 어둑했다. 우기에게서 온 연락은 단 한 건도 없었다. 주변 또한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소연은 불안감을 느꼈다. 주변을 살피며 걷는데 멀리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거리는 저쯤이고 방향은 이 방향. 인간의 달리기 기준으로 5분에서 10분이었다. 소연에게는 1분이면 되었다. 뛰는 동안 소리가 점점 더 선명하게 들려왔다. 사람이 컥컥대는 목소리가 들렸다. 목이 졸렸을 때나 낼법한 소리였다. 그게 아니면 복부라도 맞아서 숨 쉬기 힘들 때. 소연은 목소리가 선명한 지점에서 건물을 끼고 꺾었다.

 눈앞에 남자 둘과 우기가 있었다. 한 남자가 우기의 등 뒤에 서 있었고, 우기의 목을 조르는 중이었다. 우기보다 신장이 훨씬 컸다. 우기는 다리를 버둥거리며 팔꿈치로 남자의 허리를 때리려 애썼다. 그마저도 힘이 떨어져 보였다. 맞은편에 있는 남자는 주변을 살피는 중이었다. 남자가 주변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이 꼬마 완전 바보 아냐."

 말로 설득 시키고 싶지 않아졌다. 숨이 한계에 달했는지 앞뒤로 흔들던 우기의 다리가 멈췄다. 그게 신호탄이었다. 소연은 빠르게 달려가 정찰을 서는 남자의 뒤에 섰다. 남자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목을 꺾었다. 으득 소리가 나더니 남자가 바닥에 쓰러졌다.

 다른 남자가 소연을 발견했다. 소연이 몸을 돌리며 발을 공중에 뻗었다. 슬리퍼가 날아가 남자의 얼굴을 때렸다. 꽤나 아팠을 텐데도 남자의 자세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소연은 단숨에 우기가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남들 눈에는 순간이동 수준으로 빠르게 보이는 움직임이었다. 소연은 남자 뒤에 서서 오금을 발로 찼다. 그 남자의 목도 45도 꺾으려 했는데, 남자가 팔을 뻗어 우기를 다시 낚아채려 했다. 인질로 삼으려는 듯. 좋게 좋게 넘어갈 줄을 모르네. 소연은 주먹을 한 번 쥐었다. 손의 뼈들이 선명하게 튀어나오고, 팔뚝의 근육이 단단해졌다. 그 손으로 남자의 목을 움켜잡았다. 남자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소연이 남자를 집어던졌다. 남자는 10미터 정도를 날아가다 건물 벽에 부딪혔다. 쾅 소리와 함께 바닥을 굴렀다. 남자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벽이 우그러졌으니 그럴 만도 했다. 소연은 주변을 한 번 더 살핀 뒤, 바닥에 쓰러져있는 우기를 안아들었다.

 "우기 씨, 괜찮아요?"

 우기가 놀란 눈으로 소연을 쳐다봤다. 기절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아, 이건 들켰겠구나 싶어 소연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한 줄기 흘렀다. 그래도 바보 같고 귀여운 말을 자꾸 했던 우기니까, 이번에야말로 '와 언니 힘이 왜 이렇게 좋아요, 무술 배웠어요?' 같은 말이나 해주기를 바랐다. 빠르게 움직인 것도 정신없었으면 못 봤을 것 같고. 소연은 부러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괜찮은지 한 번 더 묻자, 우기가 손가락으로 소연을 가리켰다.

 "변호사님, 사람 아니죠?"

 아이고, 이건 안 되겠네. 소연은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아니, 그게 말이죠."

 "이제 큰일 난 거 아니에요?"

 "네?"

 "저, 저 때문에 정체를 들키면 어떻게 해요? 여기 CCTV 같은 게 있다거나 해서 들키면."

 와

 "죄송해요, 저 때문에 또."

 얘 진짜 귀엽다.

 "그건 걱정 안 해도 되요. 애초에 이놈들이 이러려고 불렀으면 CCTV도 없는 곳일 텐데."

 물론 여전히 답답한 구석도 있지만. 소연은 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어두워서 보이지 않겠지만 조금이라도 얼굴이 붉어진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기력이 조금 생겼는지 우기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혹시 정의의 히어로 같은 건가요? 막 초능력이 있는."

 "아니, 그런 쪽팔린 거 절대 아니니까 헛소리 하지 말아요."

 "그럼 뭔데요?"

 "여기에 더 있을 수는 없으니까 일단 가요. 아, 도로변이 어느 쪽이지."

 소연이 앞서 나갔다. 쫓아오는 소리가 없어 뒤를 돌아보니, 우기가 몹시 느린 속도로 따라오고 있었다. 다리에 힘이 잘 안 들어간다고 했다.

 "그런 건 미리 말을 해줘야죠."

 소연이 우기를 안아들었다. 우기를 안아든 채로 사람들이 못 보는 골목 사이로 빠르게 뛰어갔다. 대로변 근처에 도착해 우기를 바닥에 내려주었다. 소연이 휴대폰으로 택시를 부르는 동안 우기는 당황한 얼굴로 '저희 방금 스쿠터 탄 거 아니죠?'같은 헛소리나 해댔다. 택시가 도착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스쿠터가 아니고 앰뷸런스겠네. 들것 같은."

 "조용히 하고 제발 좀 타세요."

 좀 전에 죽을 뻔 했던 사람 맞나. 소연은 우기를 택시 안에 태운 뒤, 자신도 옆자리에 탔다. 집까지 데려다준다는 말에 우기는 순순히 자신의 집 주소를 읊었다. 택시가 출발했다. 달이 뜨고 있었다. 하루가 더럽게 길었다.

 

 *

 

 우기의 자취방에 도착했다. 소연은 우기를 방 안까지 부축해주었다. 말이 많고 순진한 소리를 해대는 이미지와 맞아 떨어지는 부분이 있으면서도 의외의 느낌을 주는 집이었다. 핑크색이나 노란색 가구가 많은 점은 예상 그대로였지만, 모든 물건들이 똑바로 제자리에 있고 정리가 심하게 잘 되어 있는 느낌은 예상 밖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예상을 아주 조금씩만 빗겨나가는 행위는 사람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법이다. 우기가 의도한 건 아니지만 이 집은 소연에게 있어 그런 느낌으로 와 닿았다.

 "그래서요?"

 우기의 말에 방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소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서라뇨?"

 "히어로가 아니면 뭔데요? 엄청 빨리 움직이고 사람을 냅다 들어서 날리던데 그게 초능력이 아니에요?"

 "음."

 소연은 잠시 고민했다. 정체를 들켜도 신분을 위조하고 새로운 삶을 살면 그만이었지만, 그래도 되도록이면 알려지지 말자는 주의였다. 소연 본인도 편하게 살고 싶으니까. 이 틈만 나면 맹랑하게 떠들어대는 아이가, 하는 말마다 답답해서 가슴을 치게 하는 아이가, 떠벌리지 않아줄까. 소연은 변명을 할지 솔직하게 말할지에 대해 가늠했다. 변명을 하면 속아줄 것도 같았다. 애초에 그 mp3를 9만원이나 주고 산 사람이니까.

 "우기 씨, 있잖아요."

 하지만 소연은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우기를 믿기로 했다. 그냥 그러고 싶은 기분이었다. 변명하자면 아침 꿈자리가 너무 사나워서. 그것 때문에 기분이 묘해져서.

 그래서 한 번만 더 믿어보기로 했다. 그 아이와 친구가 되었던 것처럼 딱 한 번만 더.

 

 "저 뱀파이어에요."

 "에?"

 "뱀파이어. 흡혈귀. 우기 씨가 생각하는 그거. 농담 아니고…"

 "헐! 그럼 몇 살이세요?"

 그 질문은 좀 의외였다. 소연은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기억이 잘 안 나요. 몇 천 년 살았어요."

 "마, 말 놓으세요."

 "네?"

 "그 정도면 말 놓는 게."

 소연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럼 우기 씨도 편하게 저 언니라고 불러주세요."

 "네, 언니!"

 소연은 그 와중에 사적 욕망을 채우는 자신이 조금은 한심하게 느껴져 우기의 시선을 피했다. 아직 남아있는 양심이 조금은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 우기야. 오늘 험한 일 많이 당해서 무섭고 힘들 텐데 이제 그만 자. 나도 집에 가봐야겠다."

 "왜, 왜요?"

 "왜냐고?"

 "저 물어볼 거 완전 많은데."

 "안 피곤해?"

 "아직은."

 "그런 일 당했잖아. 저기, 그, 실례지만 무섭거나 불안하지 않아? 걱정이 되서 그래. 혹시 혼자 있는 게 더 무서운 거면…"

 "아니, 진짜로 진짜로 괜찮아요. 처음에는 조금 무서웠지만."

 "정말이지?"

 "언니가 와서 구해줬잖아요. 고마워요, 이번에도 도와주셨고. 아무튼 결과적으로는 다 잘 됐잖아요? 저도 무사하고 언니도 무사하잖아요. 그러면 됐어요. 기분 좋으니까 됐어요."

 침대에 걸터앉은 우기가 소연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눈썹이 휘도록 웃는 우기를 보며 소연은 얼굴이 빨개지는 것을 느꼈다. 너무 착하고 귀여운 나머지 그 자리에서 뽀뽀라도 해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예전에 딱 한 번 기른 적 있는 거대한 리트리버. 걔를 보는 기분이야.

 "그래. 그럼 질문이 뭔데. 해봐."

 "뱀파이어면 막 밤에 사람 사냥해요?"

 귀엽다는 말 취소. 착하다는 말도 취소. 순수하다는 말은, 음, 오케이.

 "요즘 세상에 누가 그런 야만스러운 방식을… 넌 배고프면 산에 가서 매머드 잡니?"

 "매머드가 뭔데요?"

 "매머드 몰라?"

 "네."

 "큰 코끼리 말이야."

 "네?"

 "아니, 그러니까, 매.머.드 몰라?"

 "네."

 "매머드를 모른다고?"

 순수하다는 말도 취소. 바보 같다는 말, 은 실례일수도 있으니 취소. 이상한 애라는 말 오케이. 사람 답답해 뒤지게 하는데 재주 있다는 말도 오케이.

 "기다려."

 소연은 휴대폰에 매머드를 검색해 보여줬다. 과학 시간에 잠만 잔 거 티 내냐는 말에 그건 어떻게 알았냐며 화들짝 놀라 반문하는 모습은 기가 찰 지경이었다. 매번 잤으니까 매머드를 모르겠지.

 "얘기가 튀어나갔네. 아무튼 그런 짓은 하지 않아. 예전이라면 힘을 보충해야할 일도 많고 길거리 사방천치에 범죄자들도 돌아다녔으니 사냥이나 뒷정리도 손쉬웠지만. 이제는 기력이 남아돌아도 쓸 데가 없고 아무나 잡아갈 수 없는 세상이니까. 무고한 사람들 사냥하고 싶지는 않거든. 생고기나 레어 스테이크 먹는 정도로도 해결할 수 있어. 굳이 먹고 싶어 못 참겠는 때가 오면 아는 사람들에게 연락하면 돼. 혈액팩 한 개 정도는 얻을 수 있고."

 "약간 금연이랑 비슷한 느낌인가."

 "아마도. 항상 먹고는 싶지. 그런데 굳이 필요하진 않고. 요즘 세상에는 힘을 백 퍼센트 발휘할 일이 없거든. 그리고 대체 어느 누가 피 빨리는 자원봉사를 당해주겠어."

 "아까 사람 던진 게 최대치가 아니었어요?"

 "당연하지."

 소연은 우기의 옆에 앉았다. 매트리스가 소연의 무게만큼 눌렸다.

 

 "박쥐로 변할 수 있어요?"

 "아니."

 "3일 전에는 낮에도 영업 잘하셨잖아요. 햇빛 아래 있어도 괜찮아요?"

 "심한 햇빛 아니면 어느 정도는 견딜만해. 햇살을 오래 받으면 가렵거나 따갑기는 하지. 입술처럼 예민한 부위는 여름에 터져서 피 나기도 해."

 "마늘이랑 십자가는요?"

 "너 참 전형적인 질문을 하는구나. 마늘은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식품이 아니라서 그냥 잘 안 먹어. 십자가는 전혀 상관없어. 일단 나 무교인데다가 딱히 사악한 존재도 아닌걸. 타격 없어."

 "제 목을 물면 혹시…"

 "안 죽어."

 "그러면…"

 "네가 뱀파이어 되지도 않고."

 소연이 우기를 힐끗 쳐다봤다.

 "그렇게 실망한 표정 짓는 이유가 뭐야?"

 "아니, 질문을 꿰뚫어보는 것 같아서."

 "많이 들어봐서 그래. 정말 많이 들어봤거든, 지금 네가 하는 질문들."

 "그러면 뱀파이어는 우연히 생기는 거예요?"

 이 질문은 소연에게도 조금 신선했다.

 "피를 빼앗기는 게 아니라 받으면 될 수 있어."

 "네?"

 "뱀파이어의 피가 섞이면 뱀파이어가 되는 거야. 그러니까, 내 피를 수혈 받거나 마시면 될 수 있어."

 "언니도 그럼 누군가한테 피 줘본 적 있어요?"

 우기의 눈이 빛났다. 할머니한테 옛날 얘기를 듣는 어린아이의 표정. 굉장히 멋진 영화나 드라마의 한 장면을 상상하는 것 같았다. 그게 우스우면서도 한 편으로는 귀여워서, 특유의 성격을 잘 알 수 있어서, 소연은 손가락으로 우기의 이마를 가볍게 밀어냈다.

 "응. 딱 한 번. 있어."

 "어땠어요?"

 소연이 웃었다. 어딘지 쓸쓸한 미소였다. 오래전 기억을 회상하는지 한 동안 말이 없었다. 우기가 질문이 껄끄러웠냐고 물으려던 찰나, 소연의 고개가 우기 쪽을 향해 돌아갔다.

 "잘 안 됐어. 그게 다야."

 "그래요?"

 "응."

 소연이 입을 한 번 벌렸다 다물었다.

 "다른 질문은 없어?"

 순간 말문이 막혔는지 우기는 잠시 동안 음 소리만 내었다. 질문 없으면 간다고 할 줄 알았는데, 소연은 의외로 인내심 있게 우기가 고민하는 것을 기다려주었다. 천천히 생각해보라며 집 안을 둘러보거나 우기의 표정을 살피거나 했다. 역시 자상한 사람이구나 싶어 우기의 입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걸렸다. 3일 전에 봤을 때도 볶음밥 곱빼기로 먹어도 된다며 자신의 눈 밑을 닦아주는 손길이 너무 세심했기 때문에, 우기는 기억하고 있었다.

 "제가 보답으로 밥 한 끼 사드려도 될까요?"

 소연은 잠시 고민하더니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좋은 제안이었다. 우기가 웃으며 손수건은 그 때 돌려드릴게요, 라고 답했다. 놀랍게도 소연은 잊어버리고 있던 물건이었다.

 

 "그리고 또 질문."

 "뭔데."

 "뱀파이어들은 원래 그렇게 다 멋있어요?"

 "뭐?"

 소연의 귀가 빨개졌다. 우기가 빨개진 귀를 보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목 딱 꺾을 때 엄청 멋있던데. 그러더니 사람 목을 잡아서 날려버리고. 영화 보는 줄 알았어요."

 "다른 뱀파이어들도 그 정도는 해."

 "전 멋있냐고 물어봤는데요."

 "난 잘 모르겠는데……"

 소연이 고개를 숙였다. 우기가 소연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소연이 어깨를 들썩이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몇 천 살 먹으면 보통 능구렁이가 되지 않나, 우기는 그런 생각을 하며 잔뜩 달아오른 소연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봤다. 나보다 나이 덜 먹은 사람처럼 굴고 있잖아.

 "그럼 다른 질문."

 "뭐…"

 "저를 해치려고 한 사람의 돈을 훔치면 경찰서 가야하나요?"

 우기가 그 말을 하며 주머니에서 만 원짜리 다발을 꺼내들었다. 소연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너 그거 어디서 났어?"

 "아까 언니가 기절시킨 사람 지갑."

 "어, 언제?"

 "언니가 대로변 찾는다고 두리번거릴 때. 지갑이 바닥에 떨어져서 펼쳐져 있던데요. 날아가면서 떨어졌나 봐. 그래서 뭐, 그 사람들이 제 목 조른 만큼의 값은 아니지만 mp3 값은 되겠다 싶어서."

 "너…"

 "제가 좀 약아빠졌죠?"

 소연은 말을 삼켰다. 마냥 강아지처럼 꼬리치고 웃기만 하는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물론 약속 장소에 떡하니 나간 건 바보 같은 짓이었지만. 약아빠져서 별로냐며 눈꼬리를 내리며 우는 소리를 내는 우기를 가만히 쳐다봤다. 아이러니하게도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약아빠졌냐고? 맞다. 그런데 바보 같고 순수하냐고? 맞다. 그게 동시에 같이 있다고? 소연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 저 얼굴에 그건 좀 반칙이지.

 "아냐. 뭐, 이번엔 특수한 경우니까. 그럴 수 있지. 돈 잘 간수해."

 소연은 우기가 돈을 집어넣기 전, 위조지폐인지 아닌지 한 번 검사해주었다. 진짜 돈이라는 말에 우기가 웃으며 고마워용~ 하고 높은 톤의 소리를 내었다.

 "시간 늦었으니까 이젠 진짜 가봐야겠다. 네가 대접해준다는 식사는 날짜 천천히 잡아보자. 오늘은 진짜 푹 쉬어. 늘 조심하고."

 "네, 언니도."

 우기가 소연을 현관 앞까지 배웅했다. 소연이 신발을 다 신고 문을 열었다. 손을 흔들어주던 우기가 아차 하며 소연의 손목을 잡았다. 손목이 잡힌 채로 몸을 반쯤 돌린 소연이 무슨 일 있냐고 물었다. 걱정스러워하는 톤에 우기가 웃었다. 묘하게 볼이 빨간 우기를 소연은 가만히 쳐다봤다.

 "저 마지막으로 딱 한 가지만 더 물어봐도 되요?"

 "뭐든지."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예요."

 우기의 입술이 움직였다. 낮은 목소리가 한 글자씩 들려올 때마다 소연의 얼굴색이 달아올랐다. 듣는 동안 부끄러워진 소연이 손을 빼려 했지만 우기의 손힘이 생각보다 강했다. 대답이 왜 없냐며 우기가 웃었다. 웃는 본인도 정작 질문이 쑥스러웠는지 시선을 피했다.

 못 알아들었으면 다시 말해줄까요. 그 즈음 소연의 부끄러움이 한계치를 넘었다. 오히려 너무 부끄러워진 나머지 용기가 생길 정도로. 새빨개진 얼굴을 한 채, 우기의 눈에 시선을 맞춰왔다. 우기가 놀라 몸을 살짝 뒤로 빼자 잡힌 손을 세게 당겼다. 대답해줄게, 또박또박 말해봐. 우기가 홀린 듯 소연에게로 다가갔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이윽고 우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뱀파이어도 연애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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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mpire

Composite Authorsh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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