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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제: 앵스트 뱀파이어

 덕팸(@Im_DuckPam)

 내 여자 친구는 뱀파이어 헌터

 송우기 전소연

 A-1.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뱀파이어 헌터를 여자 친구로 둔 뱀파이어의 짧은 기록이다.

 A-2.

 실로 간단한 이야기다. 맨 처음의 문장대로 뱀파이어 헌터를 사랑하는 뱀파이어가 이 글의 주제다. 이 글을 쓰는 사람은, 우습게 들릴 수 있겠지만 뱀파이어 본인. 애초에 사람이 아니라고 보는 편이 맞겠지만 딱히 상관은 없다.

뱀파이어 같은 게 어디 있어, 하지만 의외로 인간 세계에 숨어 사는 뱀파이어는 널리고 널렸다.

 

 어쩌면 이 글이 누군가에겐 트와일라잇 같은 유치한 소설이나 영화의 도입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아니, 사실 대부분의 사람한테 그렇게 보이겠지만 아무렴 어때. 그냥 쓰고 싶어서 쓰는 건데, 이상하게 볼 걱정은 낙관적인 생각 사이로 묻어버렸다.

 

 실존하는 뱀파이어, 누군가에겐 아주 비현실적일 여덟 글자지만 그 여덟 글자 안에서 사는 무리가 한 가득이었다. 사실 한 가득까진 아니고, 그래도 제법 존재는 한단 뜻이었다.

 그런 존재들을 사람들이 모르는 이유는 들키지 않도록 살아가는 훈련을 거쳐 인간 세계로 내놓아지기 때문이었다. 몇 번이고 신분을 바꾸고 바뀌는 세대의 말과 기술을 배웠다. 그게 싫어 인간 세계로 나가지 않는 뱀파이어들도 제법 있었다.

 

 최대한 들키지 않게 살아간다고 자부하지만 간혹 가다 뱀파이어라는 걸 들킬 때가 있었다. 동물의 피를 빨아 먹다가 들킨다든지, 햇빛에 닿은 몸이 이상한 반응을 일으키는 것과 같은 사유들.

 

 미디어 상의 이미지로 비상하게 유추하는 인간들이 생각보다 많더라, 내 친구 중 하나는 태연하게 저런 이야기를 잘도 할 정도였으니까.

 

 나이들이 지긋하다보니 언어 선택이 저런 점은 어느 정도 감안을 해야 했다. 뱀파이어는 특정 기간이 지나면 외관상 늙지 않으므로 저런 단어를 써도 기껏 해봐야 뭐 애늙은이 정도로 보일 뿐이다.

 

 사실 정체를 들킨 사람이 뱀파이어 헌터만 아니라면 크게 상관없긴 하지만 이상한 질문을 받는 게 피곤해서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원래 사람들은 자기가 모르는 미지의 존재일수록 이상한 선입견이 큰 편이라서.

 - 우기야, 너 언제부터 그런 거였어? 그러니까, 그 뱀파이어? 미친, 개오글거려.

 그래, 이런 질문. 언제부터 뱀파이어였냐고 묻는 건 언제 들어도 상당히 우스꽝스러운 질문이지만 간혹 가다 물어보는 사람이 있어 적어보자면 날 때부터라고 하겠다. 나는 엄마도 아빠도 다 뱀파이어인 걸.

 두 분 다 나이가 삼천은 족히 넘으셨다고 했다. 사실 삼천 살 이후부터는 세지 않아서 기억도 안 난다고 하셨기 때문에 삼천은 족히 넘은 정도라고 추정까지만 해본다.

 그리고 나도 나이를 못 센지 한참 되긴 했다는 점만 적어놓겠다. 미디어 상으로 존재하는 엄청난 능력을 가진 뱀파이어는 사실 잘 없다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적어둔다. 기억 지우기나 엄청난 힘 같은 초능력을 가진 뱀파이어들 말이다.

 미디어 상으로 보이는 미지의 존재들에 대한 설명은 반쯤은 맞고 다른 반쯤은 틀렸다. 뱀파이어를 예로 들어 보자면 늙지 않고, 흡혈을 한다는 것, 햇빛에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것 정도까지가 옳은 종족 특성이다. 그 외의 능력들은 대부분 짜깁기라는 거지.

 어떤 거냐면 실제로 공룡은 그렇게 생기지 않았는데, 최근까지도 매끈한 가죽과 이빨이 날카로운 포식자의 생김새로 홍보되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태초의 공룡은 털이 달렸을 가능성이 더 크다나, 뭐라나.

 조금이나마 더 멋진 걸 좋아하는 습성에서 비롯된 왜곡일 것이라 추측했다. 나만 해도 그랬으니까. 다소 뜬금없는 얘기긴 하지만 나는 기린을 좋아하는데 기린이 그렇게 생기지 않았더라면, 목이 길어 제대로 잘 수 없다는 특성이나 눈물을 흘려도 긴 목 탓에 보이지 않는다는 특징이 없었더라면 기린을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근데 너희가 뱀파이어 멋있다고 생각하면 그게 뭐, 그런 심드렁한 생각이 가끔 들긴 하지만 이건 일단 뒤로 미뤄두자. 나이를 먹을 대로 먹다 보면 알 수 없는 심술이 느는 법이다.

 그러니까, 하려던 말은 그거다. 어쨌든 뱀파이어다보니 다들 신체적으로 타고 나는 능력이 하나씩은 있지만, 타고난 능력 중에 저런 초능력을 가진 뱀파이어도 물론 있겠지만 일단 그게 나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능력을 가진 애들은 뱀파이어 헌터랑 맞닥뜨려도 딱히 큰 걱정도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애초에 뱀파이어 헌터와의 전쟁이 시작되면 저런 애들이 제일 먼저 징집될 거니까.

 아까부터 언급되는 뱀파이어 헌터가 뭔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아서 적어보자면 단어 뜻 그대로다. 굳이 한국어로 풀어보자면 흡혈귀 사냥꾼이라는 뜻으로 우리 같은 뱀파이어들을 찾아 없애는 조직적인 사람들이다.

왜 없애느냐고 물으면 딱히 할 수 있는 말은 없다. 나도 듣기만 하고 경험해본 적은 없는 일이라서, 딱히 설명을 길게 할 거리도 못 됐다.

 그리고 꽤 오래 전 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그런 걸 보고 싶은 사람은 없을 테니 간략하게 줄여보자면 인간 흡혈에 대한 규제가 없었던 고대부터 인간을 척진 뱀파이어들에게 피해 입은 인간들이 뱀파이어들을 서서히 죽이기 시작하면서 전쟁이 났다고 했었다.

 그때 뭉친 인간의 후손들이 지금까지 뱀파이어 헌터라는 조직을 유지해온 게 지금 상황을 만들게 된 거라고 보면 얘기가 쉽다. 지금은 인간과 뱀파이어 사이에 협약이 있어서 인간 흡혈도 금지고, 때때로 혈액 팩이 증정되곤 하지만 여전히 인간 흡혈을 즐기는 뱀파이어들이 있어서 뱀파이어 헌터들도 해산하지 않는 거라고 들었다.

 사실 자세히는 모른다. 그냥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가보다, 하는 거지. 뱀파이어 헌터들은 유독 뱀파이어에 대한 혐오와 적개심이 강하다는 것 또한 주워들어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정작 나는 인간에 대한 별 생각이 없다. 오히려 좋아하는 편이라면 좋아하는 편이었다. 뱀파이어 헌터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인간을 멀리 하라는 주변인들도 많았지만 그럼 여기에 내려와서 어떻게 살란 뜻인지.

 음침한 구석들도, 이상하다 싶을 만큼 긍정적인 구석들도 보고 있으면 저런 게 사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편해지곤 했다. 나는 저렇게 살지 못하니까. 죽음이라는 끝이 있는 인간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불사의 몸으로 살아야하는 뱀파이어는 끝이 달랐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뱀파이어의 끝은 보통 형태도 기약도 없는 기다림이었다. 짧게 덧붙여보자면 비슷한 듯 비슷하지 않은 미디어의 뱀파이어와 닮은 점, 앞서 말한 대로 불사의 몸이라는 것이다. 뱀파이어는 죽을 수가 없는데 뱀파이어 헌터는 존재한다.

 모순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유일하게 뱀파이어가 죽을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었다. 뱀파이어라는 존재도 모르는 사람들 사이로 일찍이 뱀파이어를 혐오하는 사람들끼리만 소문이 자자했던 그 방법.

 뱀파이어를 죽일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은 순은으로 된 칼로 뱀파이어의 목덜미를 정확하게 찌르는 것으로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즉사한다고 한다. 뭐 아직까지 즉사를 해보진 못해서 이것도 잘 모르겠다.

 어떻게 된 게 이렇게 무책임한 소리만 늘어놓느냐고 묻는다면 믿을 사람은 믿고 믿지 않을 사람은 믿지 않아도 좋단 의미라고 반론하겠다. 물론 이 글을 읽게 될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앞선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면, 그런 뱀파이어 헌터와 뱀파이어가 왜 사귀느냐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야 할 것만 같다. 일단 언니는 내가 뱀파이어인지 모른다.

 언니라는 말에 의아해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제일 의아해야 하는 건 내가 뱀파이어라는 점이지, 여자가 여자를 만나는 연애는 그다지 의아해할 만한 일은 아니라고 자부할 수 있었다.

 설마 요즘 세상에도 그러는 사람이 있다면 사랑의 형태는 다양하다는 걸 알아줬으면 한다. 무슨 공익광고 같은 말을 잘도 늘어놓는 것 같은데 그냥 말이 그렇다는 것이다.

 아무튼 언니를 만나기 전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었다. 사는 게 무료하다, 그도 그럴 게 나도 나이를 놓칠 만큼의 세월을 살았으니까.

 인간처럼 이젠 내 삶에도 끝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다. 우울했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그냥, 가끔 그랬으면 하는 기분이 들 때가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죽기 전 가장 인간다운 행동을 해보고 싶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우울하진 않았지만 매너리즘에 살짝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긴 하다. 몇 번의 신분교체를 하며 떠올려본 가장 인간다운 행동은 아무래도 사랑을 하는 것이었다.

 타인을 나만큼 사랑하고 남중에서도 가장 가까운 남이 되는 행동, 득실관계로만 따져봤을 땐 전혀 이해가 안 가는 행동 같은 게 하고 싶어졌다. 그때 언니를 마주쳤다.

 그렇게 나이가 많다면서 호칭이 왜 언니냐고 질문하면 일단 만난 게 대학 선후배 사이였다고 대답할 것이다. 물론 언니가 선배였고 내가 후배였다. 그땐 그런 직위에 있어야만 의심을 받지 않을 상황이었다. 이젠 무슨 상황이었는지조차 까마득한 그 상황 속에서 나는 언니를 만났다.

 그리고 약간의 사심, 그 얼굴을 언니라고 못 부르면 후회할 것 같았다. 요즘 애들은 예쁘면 다 언니라고 한다며, 대충 그런 거였다.

 조별과제라는 이유로 만나게 됐던 첫 만남 때 묘하게 끌린다고 생각했었다. 눈빛이라든지, 말투라든지, 심지어 곧 졸업반이 가까워온다고 취준하면 못 해볼 머리를 잔뜩 해보겠다며 물들인 머리색마저도 좋았다.

 실제로 언니의 별명 중에 파워레인저가 있을 정도로 언니의 머리색은 수시로 변하곤 했는데 무슨 색을 하던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다. 이런 것까지 취향이고 난리, 뭐 그런 생각까지도 했었다. 단단히 마음에 들었다는 소리지.

 마지막을 준비하면서 연애를 하겠다고 마음먹었으니 이왕이면 저런 사람이 내 옆자리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던 찰나, 언니한테 고백을 받았다.

 생각에도 없던 딸기 프라페를 언니한테 받아 마셨던 날, 언니는 귀를 붉게 물들이고 내게 고백했다. 어떤 점이 언니의 마음을 흔들었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과탑인 언니한테 무임승차를 하려던 사람들의 갖은 이유를 들으면서도 꿋꿋이 약속장소로 나와서 언니와 팀플을 마무리한 점이 그랬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내가 한 언행 중에 언니를 흔들만한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마지막을 준비하면서 하는 연애라고 생각했던 내 예상과는 달리 일 년이 지나도록 만난 지금까지도 언니의 고백은 여전히 추측뿐이다.

 언니는 그날 그냥 내가 좋다고 했다. 손으론 영수증을 잘게 찢어놓으면서 입으로는 네가 좋아, 우기야, 그랬다. 그 말은 일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선명한 기억으로 남았다. 찢어지는 영수증을 향해 구르던 눈동자까지도 기억 속에 여전했다.

 - 언니.

 - 응?

 - 아직도 내가 그냥 좋아?

 꼭 언니 옆에만 있으면 살고 싶어졌다. 마지막 준비는 무슨, 결혼 준비나 하고 싶어지곤 했다. 자꾸 보채고, 인정받고 싶어졌다. 언니의 옆에 더 있고 싶어졌다.

 그래서 최근엔 자취방을 합쳤다. 자고 일어났는데 옆에 언니가 있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다. 가끔 피 냄새 때문에 고역일 때가 있긴 했지만 그걸 다 견디고서도 언니 옆에 있는 게 좋아서 선택한 제안이었다.

 - 우리 어차피 학교 주변에 살고, 너 계약 끝날 때 다 돼 간다며. 월세도 좀 줄이고 그럴 겸해서 물어보는 건데 우리 자취방 합칠까?

 고백할 때처럼 카페에서 언니는 영수증 또 찢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질문은 엄청 조심스럽게 하면서 눈은 여전히 찢어지는 영수증을 향했다.

 사귀는 동안 의외로 부끄럼을 많이 타는 언니가 귀엽다고 생각했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선 안 됐다. 저번에 한 번 귀엽다고 했더니 어쩐 일인지 토라져버려서 달래느라 애 좀 먹었던 경험이 있었던 탓이었다.

 암튼 그 제안을 수락해 지금까지 같은 집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한참을 물러나지 못한 잠기운에 슬그머니 눈을 뜨면 볼에 입술이 몇 번이고 닿는 이 생활이 과분하게 좋았다. 자기 전에 팔베개를 하고 나누는 필로우 톡도, 날 정해놓고 하는 대청소도, 그냥 평범한 모든 게 좋아졌다.

 이젠 나도 그냥 언니가 좋았고 보내는 나날이 좋았다. 이불 위를 뒹굴다가 언니를 끌어안고 물어본 그 질문에 언니는 웃으며 답했다.

 - 응, 아직도 그냥 좋아.

 - 좋은 데 이유가 없으면 큰일 난 거라고 했는데.

 - 그럼 싫어할 이유를 만들어보든가.

 그러면서 언니는 내 뒤통수를 몇 번이나 매만지다 몸을 일으켰다. 동글동글하게 감기던 작은 손길에 나도 웃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언니가 나를 싫어할 수 있는 딱 한 가지 큰 비밀, 그건 앞으로도 더 비밀로 하고자 했다.

 언니가 팔십이 돼도 난 이 얼굴이겠지만, 그때쯤 되면 들키기 싫어도 들키게 되겠지만 현재의 각오로는 그랬다. 언니가 늙어갈 때까지 옆에 있고 싶다, 사랑은 생각보다 더 많은 걸 바꿔놓곤 했다.

 - 송우기, 밥 먹어.

 오늘 밥 담당이 언니였었나, 순식간에 잡생각은 사라졌다. 부엌까지 나가는 짧은 시간동안 나는 바뀌어버린 가치관에 대해서 잠시 생각했다. 죽고 싶지 않아, 그러면서 곱씹었다. 사실 언니를 만나고 마음에 품기 전까진 우울했던 게 맞을지도 모른다고.

 

 B.

 

 그럼 나는 언니가 뱀파이어 헌터라는 점을 어떻게 알았느냐, 의외로 뱀파이어 헌터들은 티가 많이 났다. 어쩌면 현존하는 뱀파이어에 대한 협박과 비슷한 걸지도 몰랐다.

 뱀파이어 헌터들은 귀 뒤에 작은 타투가 있다. 듣기로는 태양을 형상화한 문양이라고 했던 것 같다. 뱀파이어는 태양빛을 쬐면 신체에 치명적이니까, 아마 그런 의미로 만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 타투를 아주 어릴 때부터 하는 사람도 있고, 좀 커서 하는 경우도 있고 사례는 다양했다. 그저 언제 사랑하는 사람을 뱀파이어에게 잃었느냐에 달린 문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손잡이에 비슷한 문양이 새겨진 순은으로 된 단검을 바지춤이나 가방에 늘 비치해두고 다니는 모습 같은 거. 실례로 언니는 조별과제를 하는 내내 가방을 자주 뒤적이곤 했는데 그때마다 단검이 형체를 드러내곤 했다. 꺼내기 쉽도록 백팩 옆 주머니쯤에 단검을 넣어둔 언니를 보며 확신했었다.

 솔직히 그때 내 입장에선 나쁠 게 없었다. 앞서 말한 대로 나는 누군가의 손에 죽고 싶었고, 그 전에 사랑을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나한텐 언니가 어떻게 보면 좋은 조건이었다는 거지.

 실제로도 그랬다. 언니와 한 달 정도만 만나고 뱀파이어라는 걸 밝히려고 했었다. 그럼 배신감에 언니가 날 사냥해줄 것 같았다. 그런 걸 계산하고 만났는데,

 - 우기야, 일어나. 나 심심해.

 이렇게까지 사랑하게 될 거라는 건 차마 계산하지 못했다. 저 말을 듣자마자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좋은데 어떻게 말해. 한 달이 일 년으로 불어나는 건 생각보다 쉬웠다. 그야 시간은 엄청 빠르게 흐르곤 하니까.

 - 언니, 잘 잤어?

 - 응.

 - 밥 먹을까?

 - 응.

 같은 대답을 내놓고 기지개를 켜는 언니를 보다가 웃음이 났다. 어두운 방안에서도 언니 하나만큼은 잘만 보였다. 애초에 뱀파이어라서 그런 건 어쩔 수 없겠지만 일단 핑계는 그렇다는 것이다.

 처음 집을 합칠 때 햇빛 알레르기가 있단 핑계로 암막커튼이 그대로 달려있는 내 자취방을 재계약했다. 어쩔 수 없었다.

 언니의 집을 재계약하면 커튼부터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지에 대한 변명을 해야만 했을 것이고, 거짓말을 잘 못하는 편인 나는 여태 어떻게 잘 넘겨왔었지만 그때만큼은 들킬지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었다.

 처음 언니가 짐을 싸들고 내 자취방에 왔을 때 조금 놀라던 모습 같은 게 생각났다. 생각보다 훨씬 어두웠는지 고개를 요리조리 돌려보던 모습 같은 게 생생했다. 햇빛이 들어오는 현관문보다 멀찍이 언니를 환영하면서 웃던 내 모습 같은 것 또한 그랬다.

 - 암만 햇빛 알러지가 있다고 해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 좀 심해.

 - 그래? 너 조별과제는 그럼 어떻게 나온 거야?

 - 선크림 엄청 바르고. 언니도 나 처음 봤을 때 그랬잖아, 넌 그 나이에 양산 쓰고 다니냐고.

 - 그랬나.

 - 그러셨어요.

 그러고 나서 언니는 아무렇지 않게 집으로 들어와 짐을 풀었다. 꼭 제 집이었던 것처럼, 물론 같이 살 집이 되었으니 언니의 집인 것도 맞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었다.

 형광등은 켜도 되지? 가벼운 그 질문에 그건 괜찮다는 답을 하면서 언니를 따라 이리저리 움직였었던 기억.

 - 짐 정도는 내가 풀어도 돼.

 - 어차피 방 같이 쓸 거면서.

 - 그건 그래.

 - 그럼 내가 쓰는 방에다 짐 풀어야지.

 그러다 말고 눈 마주친 채로 웃었던 기억과 왠지 모르게 입술을 붙이던 기억 같은 게 갑자기 떠올라 귀가 홧홧해졌다. 이 생각이 들쯤엔 오늘 아침밥 당번이 나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사실 아침이라기엔 이미 열두시가 다 된 시간이긴 하지만 적당히 김치볶음밥 같은 걸 만들면서 왠지 드는 음흉한 생각들을 날렸다.

 - 우기야.

 - 응, 언니.

 - 야채 많이 넣지 마, 골라서 먹게.

 - 잘게 잘라서 넣어도 다 골라 먹잖아.

 - 그건 맞는데 골라 먹기 힘드니까.

 - 그래.

 어느새 배에 팔을 감고 등 부근에 이마를 비비는 언니에 순간 다시 짐 풀다 말고 입술을 맞대던 그 장면이 떠올랐다. 그때도 이렇게 백허그를 하고 있다가 그랬었는데, 순간 고개를 돌렸을 땐 턱을 등에 대고 있는 언니가 보였다. 약간의 키 차이 때문인지 아래쪽에 있는 언니의 눈매에 홀린 듯이 밥을 볶고 있던 가스레인지 불을 꺼버렸다.

 - 우기야.

 - 응, 언니.

 - 방에 가자, 응?

 - 그래.

 그때도 이랬었는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식사 생각은 뒤로 날렸다. 가끔은 이래야만 할 때가 있는 거였다.

 

 * * *

 

 힘을 있는 대로 빼고서야 비로소 밥을 먹을 수 있었다. 불기운이 셌는지 조금 꼬들꼬들해진 김치볶음밥을 한 입 크게 먹으며 작게 대화를 나눴다. 엄청 효율이 있는 대화는 아니었다. 어떤 일상적인 말을 하든 사랑고백 같은 말들이 이어졌다.

 - 우기야, 너 입 옆에 밥풀 묻었어.

 그런 말을 하면서도 웃으며 밥풀을 떼어내고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먹는 언니를 보면서 인간들은 이래서 사랑을 하는 거구나, 새삼 깨달았다.

 - 언니, 우리 오늘은 뭐할까?

 - 주말이잖아, 그냥 집에 있을까? 너 좋아하는 영화 보자.

 - 그럴까.

 - 어차피 알러지 있어서 밖에 잘 나가지도 않으면서.

 - 언니 답답할까봐 그러지.

 - 나 집에 있는 거 좋아하는 거 알잖아. 집 합치기 전엔 나가야 만날 수 있었으니까 나간 거고.

 - 언닌 진짜 은근 낭만적이야.

 -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언니 입장에선 그럴 법도 했다. 언니는 나더러 낭만주의자라는 말을 달고 살 정도였으니까. 어느 날엔 언니가 생각나서 꽃을 사왔다고 했더니 꽃을 내미는 날 보고 언니는 웃으면서 그랬다.

 - 우기야.

 넌 너무 낭만주의자야, 그러면서도 웃는 얼굴로 꽃을 받아드는 언니를 보면서 허튼 짓한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웃는 얼굴이 너무 좋았으니까. 그 이후로도 꽃이나 언니 생각이 나는 물건들을 가볍게 선물했다. 어차피 오랜 세월을 산만큼 뱀파이어들은 돈이 남아도는 편이라서, 이런 식으로 허비해도 괜찮았다. 애초에 언니한테 쓰는 돈은 허비가 아니기도 하고.

 - 송낭만 씨.

 - 어?

 - 밥 먹어, 밥. 뭔 생각을 그렇게 해?

 - 언니 생각.

 그러면서 밥을 떠넘기는 동안 언니는 입 꼬리만 당겨 웃고 있었다. 숨처럼 터지는 웃음소리에 언니 쪽을 봤더니 언니가 곧 날 보며 활짝 웃고 있었다.

 - 너 멘트 맨날 생각하면서 살지, 안 그러고서야 어떻게 그래.

 - 인생은 실전이니까 항상 생각으로 훈련해야지.

 - 가끔씩 너 이런 거 보면 되게 나이 많은 것 같아.

 너무 능숙해서, 언니의 장난기 어린 말에 순간 굳었다가 다시금 태연하게 김치볶음밥을 입안에 밀어 넣기 시작했다.

 - 여자 친구가 능숙하면 좋은 거 아닌가? 아까도, 아!

 말을 돌리기 위해 그랬더니 식탁 아래로 언니의 발이 내 정강이를 찍었다. 손발은 매워가지고, 툴툴거리니까 벌게진 얼굴로 언니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 그런 말을 안 하면 되잖아.

 - 계속 생각이 나는 걸 어떡해?

 - 우기야.

 - 응.

 - 밥이나 먹을래?

 - 응, 다 먹었어.

 말꼬리를 길게 늘이며 깐족댔더니 언니는 설거지도 네가 하라며 자리를 떴다. 양치를 하러 가는 듯 욕실 쪽으로 향하는 발걸음 소리에 괜히 나도 마음이 급해졌다. 왜냐하면 놓고 간 말이,

 - 너 때문에 허리 아픈 거니까.

 뭐 그런 거였거든. 어차피 주말이니까, 할 것도 없으니까, 해봐야 배달음식이나 시켜먹고 영화나 보고 할 거니까. 몇 개 없는 설거지를 끝마치는 동안 방문을 닫는 언니의 여러 소리들이 들렸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그냥 이대로 언니가 내 정체를 알지 못하고 해피엔딩인 것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러길 바랐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평범하게, 그저 무탈하게 말이다.

 

 C.

 

 언니는 어느 날 갈 곳이 있다고 했다. 어디 가냐고 묻는 내 물음에 너도 같이 갈래, 그렇게 묻는 톤이 왠지 칙칙해서 그러겠다고 답했다. 그리고 언니는 그날 나를 데리고 꽤 산길을 찾아 나섰다. 언니한텐 익숙한 길인 것 같아 주위를 살펴보니 공동묘지인 듯 했다.

 여기저기 비석이 널려있었다. 언니는 곧 원하는 곳을 찾은 듯 발걸음을 옮겼다. 양옆으로 나란히 묻힌 묘지엔 성은 다르지만 슬하 자녀의 이름은 같은 비석이 놓여 있었다.

 - 어, 엄마 아빠. 나야. 기일이라서 오랜만에 찾아와봤어.

 잠시 망설이는 듯 머뭇거리다 입을 열던 언니는 한참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다가 문득 생각난 것처럼 나를 쳐다봤다.

 - 엄마 아빠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내 여자 친구야. 사귀는 사이. 송우기라고. 엄마 아빠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면 다 상관없다고 했으니까 괜찮겠지?

 그쯤엔 나도 비석을 향해 묵념하고 있었다. 언니의 표정을 차마 살필 수가 없어서 언니의 말이 끝날 동안 그러고 있었다.

 - 나 가볼게, 춥지 말고 따뜻하게 있어.

 그러면서 언니는 내 손을 잡아줬다. 늘 잡지만 늘 따뜻한 손에 깍지를 끼며 괜스레 코를 한 번 먹었더니 언니가 웃었다. 바람 터지는 소리를 내면서 웃은 언니는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을 툭 찔렀다.

 - 야, 울었어?

 - 안 울었거든.

 사실 좀 울었었지만, 자존심 탓에 인정할 수가 없었다. 담담히 꺼내는 이야기들에서 언니가 어떻게 살아왔을지 눈에 보이는 것 같아서 좀 울었었다.

 - 눈물 봐라.

 - 아니라고.

 - 바보야.

 - 바보도 아니거든?

 - 나 있잖아.

 - 응.

 - 언젠가는 엄마 아빠한테 널 소개 시켜주고 싶었다?

 - 왜?

 내 질문에 언니는 뒤통수 뒤로 깍지를 끼며 입김을 한참이나 내보냈다. 잠시 고민하는 것처럼 생각에 잠긴 언니를 보던 중에 다시금 언니의 말이 튀어나왔다.

 - 내 가족이 되어주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보여주고 싶어서.

 그 말엔 멀쩡히 잘 걷다가 못 참고 또 울었다. 언니는 왜 네가 우냐며 키득거렸지만 저런 말로 넘길 만한 단순한 말이 아니었으니까. 그때 언니의 웃는 눈빛이 떠올랐다. 외로워보였지만 더는 외롭지 않은 사람의 단단한 눈빛.

 - 언니.

 - 응.

 - 우리 다음 기일에도 같이 올까?

 그 질문에 언니는 잠시 망설였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대답하는 목소리가 잠겨있었지만 언니의 얼굴을 굳이 보진 않았다. 그 물음엔 앞으로도 언니의 가족이 되어주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눈치 빠른 언니는 알아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잘 모른다. 뱀파이어라고 해서 생각을 읽는 능력이 있진 않으니까.

 - 다음 기일엔 면허 따서 차타고 오자.

 그런 이야기를 농담처럼 했다가 정작 집 올 땐 아무런 말도 못하고 왔었다. 한참을 고민하는 듯 창밖으로 버스 너머의 풍경을 멍하게 보고 있는 언니를 향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느리게 쏟아지는 언니의 얼굴에다 내 어깨를 빌려주기만 했다.

 어깨 부근이 젖는 게 느껴졌지만 그 순간마저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날은 집으로 가는 내내, 심지어는 집에 도착해서도 큰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 * *

 

 - 우기야.

 - 응, 왜?

 - 너는 뱀파이어가 존재한다고 믿어?

 그리고 오늘 그런 대화를 나눴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한참을 망설여야 하는 질문이 아무렇지도 않게 감정을 푹 찌르고 달아났다. 순간 몸이 굳는 것 같았지만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언니를 바라봤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들키지 않는 게 우선이었다. 나는 언니와의 연애를 오래 유지하고 싶었으니까.

 - 갑자기 그런 건 왜? 글쎄, 어딘가에는 있겠지?

 표정관리를 하는데 애먹었다. 그런 말을 하자마자 언니는 말을 꺼냈다. 뱀파이어 헌터라는 건 알지만, 왜 하필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까. 문득 불안해졌다. 뭔가 들킨 걸까.

 - 나는 뱀파이어가 너무 싫어. 너도 알지, 나 부모님 안 계신 거. 그때 부모님 묻힌 데 같이 다녀왔었잖아.

 - 그랬었지.

 - 그거 뱀파이어 때문이거든. 거기가 뱀파이어한테 희생된 사람들이 묻히는 정부 묘지야. 밤길에 퇴근하시다가 그렇게 되셨대. 이러면 협약이라는 게 다 무슨 소용이야? 짐승 같아.

 언니의 얼굴에 스쳐 지나는 낯빛은 주로 짜증이 묻어 있었다. 어린 날의 분노를 담고 있기도 했고, 부모님의 비석을 보던 슬픔이 담겨 있기도 했다.

 - 짜증나겠다. 나 같아도 싫겠어.

 결국 내 선택은 모른 척이었다. 조금이나마 길게 이 연애를 끌고 싶었다. 언젠가는 끝날 수 있다고 해도, 그걸 다 예측하고 만났어도 나는 지금이 좋았다. 몇 천 년을 넘게 살아오는 일생 중에서 가장 좋은 세월을 보내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언니는 드디어 속편한 말을 했다는 듯 다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 다른 사람들은 그런 거 잘 모르니까 얘기할 수가 없는데 너한텐 얘기하고 싶었어, 우기야.

 - 왜?

 - 널 믿으니까? 그리고 왠지 너한텐 비밀을 만들고 싶지 않아.

 - 감동적인데?

 그런 말을 하면서 입술 위로 입술을 붙였더니 결국 언니도 뭐야, 그러면서 웃고 말았다. 곧 진지해진 얼굴로 감사인사를 덧붙이는 언니를 보면서 양심으로부터 비롯된 일말의 가책을 느끼긴 했지만 말이다.

 - 이상한 취급당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는 그냥 믿어주니까 고맙다, 우기야.

 - 그냥, 그런 거에 별 생각이 없어서.

 - 그래, 나는 진짜 뱀파이어가 싫어. 차라리 나도 아예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

 그 말을 듣는 지금, 나 역시도 언니가 차라리 뱀파이어라는 존재를 몰랐으면 싶어졌다. 죽지 못해도 괜찮으니까, 아예 이렇게 만난다는 전제 자체가 없어져도 괜찮으니까 언니가 뱀파이어라는 존재 자체를 몰랐으면 좋겠다고, 그런 생각을 하는 내내 울적한 기분이 드는 건 막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내 존재 자체를 부정해 가면서까지 언니가 좋고, 비밀을 만들고 싶지 않다는 언니한테서 느껴지는 사랑이 좋아서 나는 답도 없다고 생각했다.

 

 D.

 

 - 우기야.

 - 응, 언니.

 - 너 그냥 뱀파이어 그런 거에 별 생각 없는 거 맞지?

 어쩐지 날카로운 의심의 눈초리. 나는 거기다 대고 자연스럽게 응, 하고 대답하며 냉장고를 열었다. 언니의 뱀파이어 혐오가 얼마나 심한지, 왜 싫어하는지 알게 된 이상 섣불리 말할 수가 없었다.

 내가 뱀파이어라는 걸 언니가 알게 되면 단순한 이별로는 끝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못해도 누구 한 명은 죽지 않을까. 만약 죽게 된다면 아무래도 내가 죽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나는 죽고 싶었고, 그러려고 언니를 만났고, 살날이 창창한 언니보단 내가 죽는 편이 훨씬 나으니까.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마시는 내내 불안감이 쉽게 가시질 않았다. 언니가 뭔가 알아챈 것 같다는, 절대적으로 틀렸으면 하는 직감.

 - 언니, 나 정말 그런 거 별 생각 없어.

 - 그래.

 떨떠름하게 떨어지는 말끝이 수상했다. 나를 바라보지 않는 눈빛에 숨이 턱 막혔다. 무슨 말을 더할까, 고민해보다가 이내 관뒀다.

 - 우기야.

 - 응.

 - 거짓말은 하지 마, 알았지?

 기세가 조금 누그러든 다정한 말, 그 말에 어디에다가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는 감정들이 제멋대로 욱신거렸다. 차마 말을 꺼낼 수가 없어서 고개만 끄덕였다. 잠시 스친 눈빛은 무슨 감정이 섞였는지 감히 예측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미묘했다.

 

 * * *

 

 사실 언니가 내게 거리를 두기 시작한 시점은 일주일 정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언니는 늘 비슷하게 나를 대했지만 뭔가 달라졌다는 걸 느꼈다. 촉이라는 게 있었다.

 스킨십은 고사하고 시선도 잘 닿지 않았다. 그쯤부터 어딘가 잘못된 것 같다고 느꼈었던 것 같다.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감정 선의 연장.

 말수도 엄청 줄었다. 꼭 마음이 뜨고 있는 사람처럼 그렇게 구는 언니를 보면서 불안하다는 촉이 섰지만, 늘 그랬듯이 모른 척해왔다. 그러고 싶었으니까, 또 그래야만 했으니까.

 밥을 같이 먹어도 같이 먹는 것 같지 않았고, 무르게 대화가 이어진다는 생각 역시도 했다. 말의 비중을 백으로 따졌을 때 내가 구십이면 언니가 십 정도였다. 나사가 빠진 것처럼 어딘가 모자란 대화들.

 불안했다. 유난히 조용한 나날들, 그제야 난 깨달았다. 지금 내가 폭풍전야 속에 버려져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 * *

 

 이렇다 할 일이 없어서 잠자리에 들었다. 언니는 한참을 잠들지 못하는 듯 몸을 뒤척였다. 나 역시도 잠든 척 눈을 감았지만 쉽사리 잠에 들지 못했다. 매트리스가 몇 번이고 꺼졌다가 펴졌다. 언니가 지난 자리마다 묘하게 축축한 느낌이 남아있었다. 아무래도 땀을 흘리고 있는 것 같았다.

 곧 언니는 몸을 일으켰다. 방문 너머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퍼가 열렸다 닫히는 소리도 들렸다. 나는 눈을 감고 상상해봤다. 가방 소리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언니가 모든 사실을 눈치 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언니는 늘 백팩 속에 순은으로 된 칼을 넣고 다니니까, 그걸 보고 언니와 사귈 생각을 했었으니까.

 입 꼬리가 뚝 떨어졌다. 그토록 바라던 죽음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몇 천 년을 살아도 닿을 수 없었던 죽음이 일 년 만에 내 손아귀로 돌아왔다.

 조심스럽게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언니가 최대한 기척을 죽인 몸짓으로 침대를 향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언니가 움직이는 내내 들리는 소리라곤 바닥 위로 작게 쓸리는 언니의 발자국 소리뿐이었다.

 나는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차피 잠은 들 수 없었다. 슬그머니 실눈을 떠본다. 얇게 뜨인 눈꺼풀 틈으로 언니가 보인다.

 인어공주처럼, 순은으로 된 칼을 들고 내 목을 겨누는 언니를 보며 나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칼을 쥔 손을 떨며 배신감에 우는 언니가 실눈 틈으로 보이는데도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그저 가만히 눈을 감은 척 실눈을 뜨고 있었다.

일부러 속인 게 아냐, 나는 언니를 사랑하고 싶었어. 변명이라면 변명일 수많은 이유들이 속을 진창으로 만들었다. 나도 언니가 혐오하는 짐승 같은 사람이고 싶지 않았어. 나도 그냥 평범하게 언니를.

 

 생각은 쉽게 끊어졌다. 이런 변명들을 이제 와서 떠올려봤자 아무 의미 없을 테니까. 꼬리를 물던 생각들이 서서히 파해진다. 무너진 생각들을 다시 들어올리기를 수십 번, 그 끝엔 언니와 둘이서 나눴던 대화 같은 게 존재했다.

 지금처럼 침대에 누워서 나눴던 대화들, 진지한 대화들도 많이 오고 갔었지만 별 시답지 않은 얘기도 많이 오고 갔었다. 농담 따먹기 같은 실없는 대화 중 하나였을 대화가 머릿속에서 천천히 흐르기 시작한다.

 ‘언니, 언니는 인어공주 결말 알아?’

 언젠가 물었던 질문. 그걸 모르는 사람도 있냐고, 언니는 그렇게 답했지. 언니가 인어공주였다면 무슨 선택을 했을 것 같으냐고 묻는 질문엔 한참을 망설이더니 결국 대답을 못했어.

 ‘아, 빨리!’

 ‘못 고르겠는데.’

 ‘그럼 이걸로 골라봐.’

 ‘뭐?’

 ‘언니 결말은 디즈니일까, 원작일까?’

 ‘글쎄.’

 사실 말이야, 그때 그 질문은 우리의 결말을 물어본 거였어. 언니가 말만이라도 디즈니를 골라주길 바랐거든. 우리는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가벼운 결말이기를 무겁게 바라면서 말이야. 내 말이 너무 무거웠나봐, 그게 아니라면 언니도 그쯤에서 알고 있었나.

 언니가 모든 걸 알아버리길 누구보다 바랐던 난데, 이젠 그 선택이 조금 후회돼. 언니의 옆에 있으면서 나는 죽고 싶지 않아졌어. 있잖아, 나는 살고 싶어졌어.

 너무 그저 그런 신파 소설 같아서 눈물은 쏟아지지 않았다. 꼭 신파 소설에선 울고 나면 이별을 했으니까 난 절대로 울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다짐을 한 탓이었다.

 - 언니.

 죽일 거면 빨리 죽여, 목구멍 안으로 눌려있던 말이 툭 튀어나갔다. 모든 소리를 참고 있던 목구멍이 아릿하게 아파오던 참이었다.

 - 너는, 너는 왜.

 하필, 원망과 겁이 한데 뒤엉킨 목소리는 볼품없이 떨렸다. 사시나무 떨리듯 흔들리는 목소리에 결국 눈을 떴다. 순은으로 만들어진 칼끝은 여전히 내 목덜미쯤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조금만 더 움직인다면 베일 것 같은 위치.

 - 언제부터 알았어?

 칼끝은 여전히 목덜미를 향해 있었다. 첨예하고 단단한 촉감이 낯설었지만 거기다 대고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말을 꺼낼 때마다 짧게 위치가 바뀌는 칼끝을 뒤로 하고 무사히 질문을 끝마쳤다. 언니는 혀로 입술을 훑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을 이었다.

 - 너 저번에 낮잠 자다가 커튼 열려서 팔에 햇빛 닿았을 때.

 - 아.

 - 피부 비늘처럼 뒤집어지는 거 보고.

 꽤 오래 전 일이었다. 한 달 전쯤이었나, 같이 침대에 누워 있다가 암막커튼이 잠시 열린 사이로 팔에 햇빛이 닿았던 적이 있었다. 아주 살짝 뒤집어진 거라서 모른 척하고 있었는데 역시 알고 있었구나, 언니는 눈에 힘을 빳빳하게 주고 있었지만 어쩐지 울 것만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햇빛 알레르기라는 핑계를 댔어도, 그렇게 피부가 뒤집어지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기껏 해봐야 빨간 두드러기 정도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언니의 얼굴을 보다가 도착한 생각의 종착지는 결국 언니를 향한 질문이었다. 나는 궁금해, 그래서 언니가 생각한 결말은 뭐야?

 - 언니.

 - 왜.

 한참을 망설이다가 언니는 그렇게 답했다. 짧은 말에서 수많은 망설임이 느껴졌다. 망설임 속에서 수도 없이 닦이고 닦였을 대답.

 - 지금 언니가 인어공주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 같아?

 그 질문 끝엔 웃음이 났다. 물어볼 게 없어서 결국 같은 질문을 건네고 말았다. 언니의 눈동자가 작게 일렁거렸다. 눈에 띄게 흔들리는 눈빛에다 대고 웃었다. 나는 이제 언니가 어떤 결말을 내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

 - 너는 그걸 꼭 지금 물어야 해?

 - 언니의 결말이 디즈니일 수 없으면 받아들이려고.

 이렇게 살다 보면 언젠가 죽겠지, 그런 생각으로 살아온 나야. 웬만해선 절대 죽을 수 없는 불사의 몸을 하고서도 오만하게 인간의 삶을 꿈꿨던 나야. 그래서 감히 인간의 사랑을 탐냈던 나야.

 - 나는 정말 언니를 사랑하고 싶었어, 그게 다야.

 칼을 쥐고 있던 손은 순식간에 맥이 풀렸고 칼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런 소리가 들렸다. 이왕 말한 거 뜬 눈 사이로 보인 핏줄 서있던 손이 느지막이 진동하기를 멈췄다. 언니는 여전히 머뭇거렸다.

 - 너는 어떻게 그래?

 - 나는 그럴 수 있어.

 평생을 이렇게 살아왔으니까. 나도 언니를 이해하니까. 특이한 것으로 살아오는 일생은 과거에 매어 살아야만 하는 연좌제의 삶이었다. 내가 인간을 해하지 않았어도, 나는 언제든 인간을 해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 있었고 아무리 노력해도 그토록 바라던 인간이 될 수는 없었다.

 나도 나를 혐오해, 나도 나를 싫어해, 그런데 어떻게 언니가 날 좋아하겠어. 이미 언니가 날 좋아한다는 것부터가 이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이뤄질 수 없는 판타지라는 걸 알려주고 있었는데도 애써 무시해왔다. 그래야만 뱀파이어 송우기는 모른 척 인간 전소연의 곁에서 살 수 있었으니까.

 - 언니는 나의 모든 소원을 이뤄줄 수 있는 사람이야. 사실 있잖아, 나는.

 언니가 뱀파이어 헌터라는 걸 알고 다가왔어, 입 밖으로 내어져야 할 말이 한참을 혀끝에서 뭉그적댔다. 나는 죽고 싶었어, 불사의 삶을 끝내는 게 내 소원이었어. 그런 주제에 사랑은 또 하고 싶어서, 나는 그래서 언니한테 왔어.

 하려던 말은 생략됐다. 차마 그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타살 청탁밖에 더 되나. 껄끄럽게 마른 질문이 가루 되어 날렸다. 그냥 새로운 말을 꺼냈다. 주절주절 나오는 말은 정말 신파 소설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멋없는 독백에 가까워보였다.

 - 언니가 나 보고 그랬지. 너는 너무 낭만주의자라고.

 언니는 또 대답이 없었다. 적막 속엔 침 삼키는 소리나 시계 바늘 움직이는 소리 같은 게 존재했다. 한 번 째깍하면 그 소리를 따라 침 삼키는 소리가 한 번 났다.

 - 맞아, 그래서 언니한테 온 거야. 나는 죽기 전에 사랑이 하고 싶었고, 이왕이면 사랑하는 사람 손에 죽는 게 호사라고 생각했어.

 - 너도 진짜 잔인하다.

 - 언니 나한테 속은 거야.

 어떻게 보면 그런 거지, 내가 언니를 속인 거였다. 뱀파이어를 욕하는 말에 축 처진 눈썹으로 동조를 하며 언니를 속였고 절대 언니의 칼에 내 목이 꽂힐 리 없는 사람인 것처럼 굴었으며 흡혈에 대한 의심을 받지 않도록 늘 언니의 곁을 지켰다.

 나한테 속은 거라는 그 말을 들은 언니는 울었다. 나는 스스로 웃었다고 생각했지만 언니의 눈엔 내가 또 어떻게 보일지 잘 모르겠다. 어쩌면 겁을 먹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 같고.

 우리는 어디로 가서, 어디로 닿을까. 정녕 우리의 결말이 간단할 만큼 행복하게 잘 살았단 이야기를 담을 순 없는 걸까. 아까는 인지하지 못했던 목 부근의 상처가 따끔하게 아파왔다. 순은은 닿기만 해도 이렇게 아프구나.

 - 언니.

 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붉어진 눈과 핏대가 솟아오른 목을 하고서 그렇게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 대답해.

 여전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언니는 그저 입술을 꾹 깨물고 이 상황을 회피하고 있었다. 피한다고 뭐가 되는 게 아닐 텐데, 참.

 - 언니.

 - 너.

 - 응.

 한 번 더 독촉하려는 찰나에 언니의 입이 떼어졌다. 여전히 모든 걸 꾹 담아 누른 듯 떨리는 목소리였다.

 - 거짓말은 하지 말랬잖아.

 - 거짓말 안 하면, 나는 언니 옆에서 살 수나 있었어?

 - 송우기.

 - 나도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그쯤엔 글쎄, 나도 울었을까. 일단 언니는 울고 있었다. 어울리지도 않게 엄청 사랑한단 얼굴로 언니는 눈물을 쏟아냈다.

 그렇게 뱀파이어를 혐오한다면서도 언니는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 뭔지 모를 감정들이 울대를 잡아 누르는 것 같았다. 속부터 꽉 막힌 느낌.

 - 언니랑 연애하기 전까진 이런 걸 기다려왔었는데, 그냥 막연히 끝을 바라고 있었는데. 안 되겠어. 이제 나는 안 돼.

 

 절절하고 음습한 말들이 멋대로 입 밖을 빠져나오려고 했다. 그 속엔 끝까지 언니의 가족이 되어주고 싶단 말도 있었고, 언니 부모님의 다음 기일엔 간단한 꽃다발이나 과일이라도 사들고 가잔 말도 있었으며 면허 따면 부모님 산소보단 언니 가고 싶다던 바다부터 가보자는 말도 있었다.

 구질구질하게 쏟아지려는 말들을 한도 끝도 없이 밀어 넣어야 하는 기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언니는 바닥에 떨어진 칼을 주워 들고 한참을 망설였다. 칼을 쥔 손이 벌벌 떨렸다. 아마도 가치관의 혼동일 게 분명해서 그냥 잠시 동안 기다리기로 했다. 게다가 원래 뱀파이어 헌터들의 원칙이 그랬다. 뱀파이어를 보는 즉시 사살할 것.

언니가 어떤 결말을 내든 나는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 오늘따라 희뿌연 동네 가로등 불빛이 잘게 흔들렸고, 나를 보는 언니 눈동자도 잘게 흔들렸다. 어떤 결말일지는 글쎄, 눈을 떠봐야 알지 않을까.

 

 E.

 

 다행이도 다음 날 눈을 뜰 순 있었다. 다행이라는 건 보통 불행을 수반했다. 그럼 불행한 건 무엇이냐, 눈을 떴을 땐 언니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있었다.

 심지어 화장실의 칫솔 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이미 알게 된 이상 언니가 이곳에 머무를 수는 없었나보다.

 어떻게 해서든 해피 엔딩이 될 순 없었던 거구나, 마음이 헛하게 비워졌다. 어제까지 있던 옆자리의 온기는 이제 없었다.

 나보고 나가라고 하지, 갈 데나 있나. 이 상황에도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선 본가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고 했던 언니였다. 집을 합치려고 원래 자취방 재계약도 하지 않은 언니였다. 근데 언니가 갈 곳이 어디 있어.

 암막커튼을 열어 괜히 살을 지져봤다. 비늘처럼 징그럽게 솟아오르는 피부, 한참을 그렇게 더 있으니 그 위로 그을린 마냥 검은 자국이 생겼다.

 이러다간 정말 없어질 것 같아서 암막커튼을 다시 쳤다. 사실 햇빛을 쐰다고 해서 죽을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언니가 다시 돌아오고 싶을 수도 있잖아, 뭘 사러 간 걸 수도 있고, 다시 내가 가족이 돼 주길 바랄 수도 있으니까.

 암막커튼을 닫는 내내 그런 생각을 했다. 결국 제자리에 있어야 하는 이유도 언니뿐이었다. 그리고 이건 내 핑계였다. 이젠 살고 싶어져서 마음대로 끝을 낼 수도 없었다.

 모든 게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차라리 언니랑 마주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그게 된다면 나는 조별과제 팀이 정해지기 전날 자체 휴강을 했을 거고, 언니를 만날 만한 일 자체를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언니와 만나며 삼시세끼를 챙기는 버릇을 들였더니 문득 배가 고픈 것 같았다. 정작 뱀파이어는 허기라는 걸 느낄 수도 없는 존재들인데.

 어딘가 텅 비어버린 느낌이었다. 나도 살 곳이 필요해서 사람의 마음에 둥지를 튼 걸지도 몰랐다. 죽고 싶다고 생각했었지만 사실 그게 가장 살고 싶다는 신호일지도 몰랐다. 그저 매너리즘일 수도 있었다.

 이런 선택을 한 나를 이렇게까지 후회할 거였다면 차라리 그냥 그렇게 사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고, 그 생각을 할쯤엔 비로소 울 수 있었다.

 정말 웃긴 건 뱀파이어는 눈물도 따뜻하지 않다는 것이다. 정말 내 주변에 따뜻한 건 사람인 언니뿐이었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결국엔 냉기 안에 남은 건 나뿐이었다. 언니는 새로운 온기를 찾아 떠날 수 있겠지, 우리는 영영 만나지 못하는 걸까?

 

 이 글을 읽고 있을 사람은 맨 첫 문장을 기억하나 모르겠지만, 이건 뱀파이어 헌터 여자 친구를 뒀던 뱀파이어의 짧은 기록이야.

 내가 이 기록을 남긴 이유는 글쎄, 아무래도 내게도 유일했던 가족을 찾고 싶어서가 아닐까?

 사실 나도 잘 몰라, 이 글을 언니가 읽는다고 해서 나를 찾아올지 아닐지조차 모르지만 그냥 남겨보는 거야.

 

 F.

 

  [To 나의 모든 소원을 이뤄줄 수 있는 언니에게

 

  언니는 나보고 그렇게 낭만주의자라고 했는데

  편지를 엄청 써준 기억은 없는 것 같아서 좀 민망해

  그냥 언니가 떠나고 나서 나는 그런대로 잘 살아

  언니를 사랑했던 일 년 동안 후회한 적 없었는데

  이렇게 되니까 후회가 많이 돼

  차라리 그때 뱀파이어인 걸 밝혔으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 정말 가끔씩 해보는데

  이러나저러나 결국 결말은 이랬을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해

  내가 욕심을 낸 탓이겠지

  편지가 닿을지조차 모르겠지만

  이 편지를 읽었다면 내가 많이 사랑한다는 것만 알아줘

  여전히 언니의 가족이 되어주길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From 우기]

 

 프롬 자리에는 수도 없이 수정 테이프가 덮인 흔적이 있었다. 수정 테이프가 덮인 가장 아래에 적힌 문장은 거짓말쟁이, 다섯 글자였다. 그도 그럴 게 우기는 이 편지에서마저도 거짓을 택했다.

 그런대로 잘 산다는 문장이 그랬고 후회가 많이 된다는 문장이 그랬다. 우기는 정신없이 부딪히고 다녀서 온몸에 멍을 달고 살았고 빨래를 돌리다가 문득 끓여놓은 된장찌개에 밥을 먹었다.

 또 우기는 전혀 후회하지 않았다. 그냥 소연과 사랑했던 그 흔적을 붙잡고 이만큼이나마 사랑한 걸 다행이라고 여겼다.

 꽤 옅어진, 검게 그을린 팔위로 무언가 떨어졌다. 편지지에 적힌 내용 몇 개는 소리도 없이 번져 무슨 내용인지 알아보기가 힘들어질 정도였다.

 우리는 어디로 가서, 어디로 닿을까. 우기 스스로 질문했던 근본적인 물음에 우기는 이제야 자문자답을 할 수 있었다.

 우리는 죽음 가까이로 가서, 이별에 닿았다. 우기는 몸을 일으켰다. 소연과의 사랑에서 남은 흔적은 감정뿐인데도 우기는 여전히 소연을 그리며 산다.

 우기는 편지 쓰다 말고 밥 먹을 채비를 했다. 정신없이 그래야만 소연 생각이 그나마 덜 나는 탓에 우기가 선택한 행동이었다.

 그러니까, 우기가 그리는 소연은 어느 정도 제 옆에 있었다고. 우기는 어느새 아문 목덜미의 상처를 되짚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내게 올 수 없다면 차라리 누구보다 더 잘 살라고.

 

 - 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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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mpire

Composite Authorsh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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